위창 오세창 ‘간송문화’ 기틀 마련[의학신문·일간보사]위창 오세창(1864-1953) 약력근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전각가(篆刻家)이자 탁월한 감식안(鑑識眼)을 지닌 서화사(書畵史) 연구자이기도 한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은 조선말기의 역관(譯官)으로, 개화사상의 선각자이자, 서화가로 유명한 역매(오경석(亦梅 吳慶錫, 1831-1879)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친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일단을 이어받아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3·1 만세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투옥
[의학신문·일간보사]라흐마니노프피아니스트인 필자의 최애 음악가는 쇼팽과 슈만이다.좀 더 넓게 생각하여 음악가인 필자는 ‘어떤 음악가를 동경하고 사랑하고 있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피아노 솔로곡·앙상블곡·가곡·오페라·합창곡·교향곡 등 다양하게 범위를 넓혀서 생각해 봤을 때, 필자는 이 음악가를 동경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ievich Rachmaninoff, 1873년 4월-1943년 3월)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유명
신지식인 춘곡 고희동 간송의 큰 스승[의학신문·일간보사] 1938년에 개최된 보화각(葆華閣) 상랑식(上樑式)과 개관식의 사진 두 장에는 이상범(李象範, 화가), 월탄 박종화(朴鍾和, 역사소설가), 고희동(高羲東, 화가), 안종원(安鍾元, 서예가), 오세창(吳世昌, 서예가 금석학자), 간송 전형필(全鎣弼), 박종목(朴鍾穆, 간송의 외사촌 형, 박종화의 형), 노수현(盧壽鉉, 화가), 이순황(李淳璜, 간송의 수집 도우미) 들이 있다. 개관기념일 사진에는 안종원 대신 김용진(金容鎭, 서예가)이 있다.이들은 1934년 간송의 오랜 꿈을 실
‘간송 컬렉션’ 멘토·도우미 역할 크다[의학신문·일간보사]오늘날 ‘간송 컬렉션’을 이루게 된 것의 가장 중요 포인트는 간송 자신의 문화재 수집에 대한 혜안(慧眼)과 결행(決行)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을 이루는 데는 간송이 아무리 큰 재력을 가졌다고 해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되는 일이었다. 즉 간송은 필요한 시기마다 여러 도우미들의 협력과 후원, 지지 속에 이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간송의 업적을 도운 멘토와 도우미들의 도움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내용의 일부분은 간송문화의 간송 약전 등에서 요약하였다.◇간송의 선
‘간송의 문화보국 정신’ 3대가 계승[의학신문·일간보사]간송미술문화재단 설립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으로 운영되던 체제에서 2013년에는 재단으로 발족하여, 2013년 8월 재단법인 간송미술문화재단이 발족되고, 초대 이사장으로 전성우(간송의 장남)가 취임하였다. 따라서 재단법인 간송미술문화재단 산하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이 속하고, 2024년에는 대구간송미술관이 개관하여 이 재단에 속하게 된다.2018년 4월에 초대 이사장 전성우가 별세하여, 2018년 6월에 전영우(간송의 차남)가 간송미술문화재단의 2대 이사장 취임하
간송미술관, 국보 12점 포함 2만점 소장[의학신문·일간보사]간송미술관 개관1971년 가을에 구 보화각 건물이 간송미술관으로 개명(改名)되면서 간송미술관이 개관(초대관장: 전성우·간송의 장남)되고, ‘제1회 간송미술관 전시회’(제목: 겸재 정선)가 개최되었다. 그후 이 전시는 매년 봄·가을 2번에 걸쳐 계속되어오고 있다. 간송미술관의 석판 글씨는 유명한 서예가인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의 글씨이며, 현재도 간송미술관 입구에 벽기둥에 걸려있다.2025년 4월 현재 간송미술관(현재의 소유자 정식 명칭은 뒤에서 설명
[의학신문·일간보사]헨 델Ⅱ헨델은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였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비교했을때 제작비가 훨씬 적었고, 준비해야 하는 스태프들의 인원도 줄일 수 있었기에 오페라에 비해서 조금은 쉽고, 빠르게 무대를 준비할 수 있었다.또한 영국 런던에서 오페라의 인기가 점점 식어가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오라토리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눈치가 백단이었던 헨델은 진작에 오페라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캐치하였고, 새로운 대안으로 오라토리오의 작곡을 시작하였다. 참 똑똑하고 시야가 넓은 예술가였다.보통 그 시대의 오페라들은 이탈리아어
간송, 목숨 걸고 민족문화재 지킨 ‘의인’[의학신문·일간보사]한국전쟁 중에도 지켜낸 문화재한국전쟁(1950-53년)의 혼란 속에서 상당수 서화와 도자기류, 수만 권의장서를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훈민정음과 조선시대의 서화 및 고려시대 청자 등 민족 문화재의 정수만은 전쟁의 참화로부터 지켜내고자 하였다.1951년 1‧4후퇴를 계기로 울산의 모처에 피난을 내려간 간송은 보화각의 문화재를 부산으로 호송하여 영주동 어느 별장에 보관토록 했다.수복 후에는 전시(戰時)동안 서울 보화각에서 유출된 서적 등 많은 것들을 다시 사들여서 보완하였다
간송이 ‘보성고보’ 인수한 이유는?[의학신문·일간보사]보화각 상량식과 현액1938년 윤 7월 5일(양력 8월 29일)에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의 상량식이 치러진다. 75세 고령인 위창 오세창은 생전에 이런 경사를 보게 되어 더 없이 기뻐서 보화각 정초명(定礎銘, 머리돌)을 지어 돌에 새겨 놓았다. 보화각 정초명의 한자 원문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維戊寅閏七月五日 澗松全君之葆華 閣上樑式畢 予不勝栢悅 爰祝以銘曰 屹立丹雘 俯臨北郭 萬品綜錯 充牣新閣書畫孔嘉 古董堪誇 萃于一家 千秋精華槿域遺艁 獲能討攷 與世同寶 子孫永葆葦滄
민족 문화유산 수집·보관·연구 터전 마련[의학신문·일간보사] 간송 꿈의 실천 위한 터전인 ‘북단장’ 문화 콤플렉스 개설이렇게 제일급 수준의 우리 문화유산들이 속속 간송의 수집으로 모여들자, 간송은 이의 보장(保臟)과 연구를 위한 터전 마련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그래서 당시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현재 서울시 성북동 일대)에 있던 프랑스인 석유상(石油商) 블래샹의 별장을 인수하고, 그 주변 땅 1만여 평을 아울러 사들여서, 이곳에 북단장이라는 문화 콤플렉스를 개설한다. 이때가 간송 나이 29세 때인 1934년 7월의 일이다.북단장이라는
[의학신문·일간보사]헨 델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의 위대한 음악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함께 바로크 시대를 이끌어간 음악계의 대가이자 거장이라 할 수 있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deric Händel, 1685.2.23-1759.4.14)도 바흐와 같은 해에 독일에서 태어났다.너무나도 비슷한 점이 많은 두 음악가이지만 바흐는 평생 독일을 떠나지 않고 활동하였고, 헨델은 너무나도 독일을 떠나고 싶어했으며, 결국은 영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보통 헨델을 표현하면 ‘음악의 어머니’라고 할 정도로 바흐와 양대산
대학시절 ‘문화재 보호 민족적 대임’ 새겨[의학신문·일간보사] 앞에서 간송의 위대한 일대기와 시진을 보았고, 간송의 문학적·미술적 안목과 솜씨로 만들어진 자신의 그림·서예·도예작품도 감상하였다. 이번호부터는 그의 생애에 이룩한 업적들을 항목별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 업적 부분의 내용들은 간송문화(澗松文華) △41호의 간송선생 평전 △51호의 간송이 문화재를 수집하던 이야기 △55호의 간송이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하던 이야기 △70호의 간송 전형필 △9
[의학신문·일간보사]
[의학신문·일간보사]앞에서 ‘간송의 연보·생애’와 ‘간송의 그림·글씨·도예 등의 작품 감상’을 살펴 보았다. 이번 4장에서는 사진으로 보는 간송 선생의 생애를 정리하고자 한다.간송의 선대 사진, 간송 자신의 일대기 사진 들, 보화각 설립, 간송의 문화재 수집 관련 사진, 간송의 활동과 업적 관련 사진, 간송의 영결식 사진, 사후 중요 사진, 후대 가족 사진 등으로 구성되며, 간송의 생애를 자세히 알면서 업적을 기리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사진들이다.1910년대부터 남긴 사진들을 통해서 간송이 ‘문화보국(文化保國)’을 실천한 흐름을 생
[의학신문·일간보사]간송 선생 약력, 저술목록, 묵적(墨蹟), 추도 관련 기사(1962년) 총정리
[의학신문·일간보사]간송 서예 ‘대개창호’(大開窓戶, 1957년)大開窓戶看雲生(창문을 크게 열고 구름 치는 것을 바라보다), 지본 (출처: 澗松文華 41, 8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서예 ‘목정암’(木精庵, 1958년)木精庵, 蕙谷寄來紫煙文林, 書此委報(혜곡이 자연 문림을 가져와서,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한다). 간송이 혜곡 최순우에게 써준 현액이다. 지본 (출처: 澗松文華 8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서예 ‘초우장’(蕉雨莊) 간송이 동료 초우 황수영(蕉雨 黃壽永에게 쓰 준 현판 글씨이다, 지본 (출처: 澗松文華 41호, 간
[의학신문·일간보사]앞에서 살펴본 간송의 생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간송은 한평생 그 많은 명품을 수장하는 혜안을 가지고 노력해서 나라의 보물을 지켜낸 선구자이다. 간송은 훌륭한 스승과 동료, 제자들과 교유하면서 그림·서예·도예·전각(篆刻) 등에서도 전문가 수준 이상으로 탁월한 시문화(詩文畵)가 상승(上乘)에 이르렀던 전통적인 문한지사(文翰之士)이었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간송 자신의 그림·서예·도예 등의 작품을 살펴보고, 그의 문기(文氣)의 사향(麝香)을 감상해보기로 한다.그의 작품은 현재 대구간송미술관의 상설 전시관인 ‘간송의
[의학신문·일간보사] ‘간송문화’ 총 96호(금년 4월에 발행된 96호를 포함해서) 중에서 간송에 관련된 특집호는 다음과 같다. 3호(書藝 II阮堂 (2) 澗松十周忌紀念號, 1972년 10월), 20호(陶藝 II 白磁, 開館十周年紀念號, 1981년 5월), 23호(澗松二十周忌紀念號), 41호(澗松三十周忌, 開館二十周年紀念號, 1991년 10월), 55호(葆華閣設立60周年紀念, 1998년 10월), 62호(繪畵 XXXVIII 澗松四十周年紀念 山水人物名品, 2002년 5월), 70호(綜合五 澗松誕辰百周年紀念號, 2006년 5월), 75
소장학자 문화재·미술사 연구 독려[의학신문·일간보사] 해방 이후 간송이 공식석상에 참석하는 자리는 오직 문화재보존위원회 뿐이었다. 미군정시절의 고적보존위원회 시절부터 위원회 위원으로 위촉 받아 활동했던 모양이다. 당시 간송만큼 문화재 보존 문제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과 투철한 의식을 가진 이는 없었을 것이며, 수집보호에 이르러서도 간송을 능가할 인물은 없었을 터이니 문화재 보존을 위한 자문위원회에 간송이 빠지고서는 그 위원회 자체가 성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이후 고적보존위원회가 문화재보존위원회로 바뀌면서도 간송은 계속 제1분과와 제
기와집 열채 값으로 ‘훈민정음 원본’ 구입[의학신문·일간보사] 간송이 35세 나던 해인 1940년 2월 11일에는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이 내려져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으로 흡수되는 위기를 맞았던 해였다. 이미 1938년부터는 일제가 학교 교육과목에서 조선어 과목과 한문 과목을 폐지하여 언어말살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었는데, 이제 일본어 상용과 창씨개명이라는 극한의 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게 되니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던 우리민족의 찬란한 문화전통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된다.이에 간송은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고종의 뜻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