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의 간송문화(澗松文華)를 탐하다 -15
‘간송 컬렉션’ 멘토·도우미 역할 크다
[의학신문·일간보사]
오늘날 ‘간송 컬렉션’을 이루게 된 것의 가장 중요 포인트는 간송 자신의 문화재 수집에 대한 혜안(慧眼)과 결행(決行)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을 이루는 데는 간송이 아무리 큰 재력을 가졌다고 해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되는 일이었다. 즉 간송은 필요한 시기마다 여러 도우미들의 협력과 후원, 지지 속에 이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간송의 업적을 도운 멘토와 도우미들의 도움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내용의 일부분은 간송문화의 간송 약전 등에서 요약하였다.
◇간송의 선대: 조부 전계훈, 친부 전영기, 양부 전명기= 생가 혈통을 이어받은 백씨(伯氏, 출생으로 따지면 친형님) 전형설이 1919년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요절하고(간송 14세), 양부인 전명기는 같은 해인 1919년에 50세 나이로 별세하고(간송 4세), 친부인 전영기는 1929년에 돌아가서(간송 24세), 간송은 졸지에 24세의 대학생일때에 양쪽 집안의 재산을 합쳐서 10만석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조선 제일 갑부가 된 것이다.
이 선대의 재산과 가르침이 간송의 가장 든든한 뒷받침이 된 것이다. 이 재산이 간송이 빛나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모으는데 가장 기초적 재정적 밑받침을 하였으니, 조부 친부 양부 모두가 간송의 가장 큰 멘토이었다.
◇간송의 외가: 외숙부 박대혁, 외사촌 박종목, 월탄 박종화 형제= 간송의 모친 밀양 박씨는 송암 박대혁(훈련원 첨정 역임)의 여동생으로서, 박대혁은 간송의 외숙부이고, 간송의 모친은 박종목과 월탄의 고모이다. 즉 간송과 박종목 월탄 형제와는 외사촌 간이다.
간송보다 5살 연상인 월탄과 간송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어울려 지냈고, 둘은 휘문고보 출신이다. 간송이 휘문고보 당시 독서를 좋아하고, 많은 책을 모아서, 1922년에 간송이 휘문보고 2학년 쯤 간송은 수집 도서가 100여권이 되었다. 부친 전영기는 간송에게 서재를 만들어 주고 그 곳에 책장도 여러 개 설치하여 간송의 학구열을 지원하였다.
또한 외숙부 박대혁은 간송의 독서열을 기특하게 여겨, 옛 책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책 간수법, 책 목록 작성법을 가르치고, 엣 사람의 좋은 말과 행실을 공부하여 식견을 넓히도록 책을 꾸준히 읽으라고 조언하였다.
청자부(靑磁賦)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선(線)은/ 가냘핀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러/ 보살(菩薩)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사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陰影)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
고 깨끗한 비취(翡翠)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
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년 묵은 고려 청자기!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베개/ 흙
이면서 옥(玉)이더라.
구름 무늬 물결 무늬/ 구슬 무늬 칠보 무늬/ 꽃 무늬 백학(白鶴) 무
늬/ 보상 화문(寶相華紋) 불타(佛陀) 무늬/ 토공(土工)이요 화가더라/
진흙 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
(千仞絶壁菊花生, 曲玉其人一琴間: 간송이 취중에 그리다. 천길 절벽에 국화는 피었는데, 곡옥 같은 그 사람은 가야금을 타는구나). 1956년 간송과 월탄이 같이 술 마시면서 즉석에서 간송이 그림을 그리고, 월탄이 글씨를 쓴 작품.
서재가 완성되자 박대혁은 간송 서재 이름을 ‘옥정연재(玉井硏齋)’로 작명하고 현판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이 ‘옥정연재’의 뜻은 우물에서 퍼올린 구슬 같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를 쓰는 집으로, 간송의 다른 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즉 옥정연재는 간송의 독서와 사색이 공간이 되었고, 나중에 위창 오세창이 현판 글씨로 남기는데, 현재 서울 방학동에 있는 간송옛집에는 복사 현판이 걸려있다. 대구간송미술관의 간송의 방에도 옥정연재의 설명이 있다.
월탄은 뒤에서 따로 설명하고, 박종목은 간송의 재정적인 면에서 지원을 하였는데. 보화각 개원에서부터 1940년 간송이 보성고보를 인수할 때, 재단 상임이사를 맡아서 재정적·행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참고로 필자의 중·고등·대학교 동기로 오랫동안의 학우(學友)인 박동철(朴東哲) 정형외과의원 원장의 조부가 박종목이고, 월탄은 종조부이다. 박 원장은 어릴 때 간송을 “성북동 할아버지”로 불렀다고 한다. 필자가 대학교 시절 을지로 입구에 있던 박동철 원장의 99간 고옥의 사랑방을 자주 방문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현재는 흔적도 없이 고충 건물이 들어서 있어, 잘 보존하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월탄은 널리 알려진 역사소설의 문학가이다. 간송보다 다섯 살 위의 외사촌 형으로서 간송의 소년·청년 시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박대혁 아버지의 권유로 휘문고에서 수학하고 졸업 후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문학인(文學人)의 길로 들어섰다. 월탄과 간송은 서로의 교류를 통해서, 월탄은 문학으로 나라에 보답하고, 간송은 문화유산 수집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청년시절의 다짐을 전생애(生涯)를 통해 서로 실천한 것이다.
월탄의 문학 세계에 대한 해설은 분량이 많아서 생략하고, 월탄이 간송컬렉션에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면 이 연재 제6장에서 설명하였던 간송이 수집한 수장품 중 가장 우수한 것 중 하나로 고려청자의 최고명품인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高麗靑磁象嵌雲鶴文梅甁, 일명: 천학매병, 국보 68호)를 감상한 월탄은 청자부(靑磁賦, 1946년 발표)’라는 시를 남겼다.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 배종우 경희대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