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의 간송문화(澗松文華)를 탐하다 -11

간송미술관

간송이 ‘보성고보’ 인수한 이유는?

[의학신문·일간보사]

보화각 상량식과 현액

1938년 윤 7월 5일(양력 8월 29일)에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의 상량식이 치러진다. 75세 고령인 위창 오세창은 생전에 이런 경사를 보게 되어 더 없이 기뻐서 보화각 정초명(定礎銘, 머리돌)을 지어 돌에 새겨 놓았다. 보화각 정초명의 한자 원문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보화각 정초명(定礎銘, 머리돌)(1938년. 간송미술문화재단)
보화각 정초명(定礎銘, 머리돌)
(1938년. 간송미술문화재단)

維戊寅閏七月五日 澗松全君之葆華 閣上樑式畢 予不勝栢悅 爰祝以銘曰 屹立丹雘 俯臨北郭 萬品綜錯 充牣新閣書畫孔嘉 古董堪誇 萃于一家 千秋精華槿域遺艁 獲能討攷 與世同寶 子孫永葆葦滄 吳世昌
[번역: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全君)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을 굽어본다. 만품(萬品)이 뒤섞여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書畫)는 매우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 만하네. 일가(一家)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精華)로다. 근역(槿域)의 남은 주교(舟橋)로 세밀히 살펴 연구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위창 오세창]

참고로 대구간송미술관이 2024년 개관되어 개관기념 국보보물전 전시회를 개최하니, 그 전시회 이름이 ‘여세동보(與世同寶. 세상 함께 보배 삼아)이다. 여세동보(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길이 보존하세)가 이 정초명에서 유래한다.

위창은 보화각이라는 이름을 이미 지어놓았듯이, 정초명에 이미 보화각이라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고, 집이 완공된 뒤에 곧 바로 보화각이라는 묵서현액(懸額)을 전서(篆書)로 써서 걸게하니, 현재까지 걸려있는 보화각 현판이 그것이다.

보화각이 완공되어 산뜻한 위용을 드러낸 뒤 그 개관을 경축하는 기념식이 1938년에 거행되었는데, 보화각 개관 기념일에 북단장에서 기념사진이 두장 남아있다.

보화각 개관 기념일에 북단장에서 기념사진(1938년. 왼쪽부터) 청전 이상범(화가), 월탄 박종화(역사소설가, 간송 외사촌형), 고희동(화가), 안종원(서화가), 오세창(서예가 금석학자), 전형필, 박종목(간송 외사촌형), 노수현(화가), 이순항(한남서림 운영, 간송의 수집 도우미)(간송미술문화재단)
보화각 개관 기념일에 북단장에서 기념사진(1938년. 왼쪽부터) 청전 이상범(화가), 월탄 박종화(역사소설가, 간송 외사촌형), 고희동(화가), 안종원(서화가), 오세창(서예가 금석학자), 전형필, 박종목(간송 외사촌형), 노수현(화가), 이순항(한남서림 운영, 간송의 수집 도우미)
(간송미술문화재단)

민족교육을 위한 보성고보 인수

간송의 또 하나의 꿈인 구국(救國)교육을 위해서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실천하는 교육장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1940년 6월에 60만원(황해도 연백의 3천석지기 땅을 팔아서 마련함)의 거금을 출자해서 동성학원을 설립하고, 1년간에 걸쳐서 보성고보(普成高普)를 인수하였다.

보성(普成. 널리 사람됨을 이루다)고보는 1906년 고종의 칙명으로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이 설립한 학교이다. 학교 건학이념은 ‘흥학교 이부국가(興學校 以扶國家, 학교를 일으켜 나라를 버틴다)’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천도교 재단이 인수하고, 1919년 기미독립선언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린(崔麟)교장 당시에 학교 내부의 인쇄실인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다. 1924년 불교재단으로 넘어간 후 재정이 악화되어, 1935년 고계학원(高啓學園)으로 넘어갔으나 계속 부실한 재단으로 파산 상태였다. 또한 1938년 일제가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실시해서 폐교 위기에 처하였다.

간송이 보성고보를 인수한 이유는 △우민(愚民)정책으로 우리 민족을 영원히 노예로 만들려는 일제의 교육정책에 항거하여 우리 민족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겠다는 것과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할 인재를 양성해야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깨닫게 하여 △장차 이 민족문화 계승을 위한 건전한 역군을 만들고자하는 것이었다.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 배종우 경희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