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의 간송문화(澗松文華)를 탐하다 -12

간송미술관

간송, 목숨 걸고 민족문화재 지킨 ‘의인’

[의학신문·일간보사]

한국전쟁 중에도 지켜낸 문화재

국보해외출품작을 고르는 간송과 손재형(1957년. 간송미술문화재단)
국보해외출품작을 고르는 간송과 손재형
(1957년. 간송미술문화재단)

한국전쟁(1950-53년)의 혼란 속에서 상당수 서화와 도자기류, 수만 권의장서를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훈민정음과 조선시대의 서화 및 고려시대 청자 등 민족 문화재의 정수만은 전쟁의 참화로부터 지켜내고자 하였다.

1951년 1‧4후퇴를 계기로 울산의 모처에 피난을 내려간 간송은 보화각의 문화재를 부산으로 호송하여 영주동 어느 별장에 보관토록 했다.

수복 후에는 전시(戰時)동안 서울 보화각에서 유출된 서적 등 많은 것들을 다시 사들여서 보완하였다. 한국전쟁 기간에 간송이 소장품을 지켜낸 이야기는 정말로 아슬아슬하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즉 간송은 선조들이 남긴 불후의 명작을 목숨을 걸고 지켜낸 문화적 의인(儀人)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지 ‘고고미술’ 창간 주도

고고미술동인회 창립, 고고미술 창간<br>​​​​​​​(1960년, 간송미술문화재단)
고고미술동인회 창립, 고고미술 창간
(1960년, 간송미술문화재단)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된 이후 서울로 돌아온 간송은 전화(戰禍)에 파괴된 고적과 문화재 보존을 위하여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당시 국립박물관의 남운 이홍직(南雲 李弘稙, 1909-1970),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초우 황수영(蕉雨 黃壽永, 1918-2011), 수묵 진홍섭(樹默 秦弘燮, 1918-2010), 삼불 김원룡(三佛 金元龍, 1922-1993) 등과 교류하던 전형필은 이들과 함께 1960년 8월에 ‘고고미술동인회’를 발기하고, 학술지인 ‘고고미술’의 창간을 주도하였다.

창간호(1960)에 실린 창간사를 통해 “고의적인 도굴이 성행하여 유적이 파괴되는 것은 고사하고 거기서 발견되는 중요한 미술품이 시중에 흘러나와 결국에 가서는 국외로까지 불법 유출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를 발간했다”고 밝히고 있다.

1950년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을 계기로 상속받았던 부동산과 유동자산이 상당 부분 고갈된 상태에서, 1959년 보성중고등학교에서 발생된 대형 부채로 말미암아 재정적 압박이 심화되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간송은 고고미술동인회 운영과 고고미술 발간 경비의 대부분을 부담하였다. 간송과 선각자들에 의해 씨앗이 뿌려진 ‘고고미술동인회’와 ‘고고미술’은 후학에 의해 1968년 2월에 ‘한국미술사학회’와 학술지 ‘미술사학연구’로 개편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보 해외전시회에 적극 참여

또한 간송은 1957~958년에 걸쳐서 국보 해외(미국·유럽) 전시회 준비에 적극 참여하였고, 실제로 간송의 수장품을 전시하는데 제공하여, 우리나라 유물의 우수성을 외국에 알리고 국위를 선양하는데 노력하였다.

간송 57세에 갑작스런 서거

간송에게 추서된 금관문화훈장<br>​​​​​​​(2014년,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에게 추서된 금관문화훈장
(2014년,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은 1962년 1월 26일 급성신우염으로 갑자기 서거하였는데, 그때가 그의 나이 57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보성고등학교 교정에서 거행된 영결식의 사진은 앞의 연재에 포함되어 있다. 간송은 사후에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서, 대한민국 문화포장(1962년)과 대한민국 문화훈장 국민장(1964년)을 추서 받았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설립

1962년 간송의 급작스런 서거 이후에 보화각의 기능은 일시 정지되었다.

그러나 간송이 서거하고 나서도 간송이 수집해 놓은 소장품을 연구 발표하고자 하는 열망은 계속되었다. 1965년 장남 전성우(全晟雨, 1934-2018년)가 미국 유학 중에 귀국하면서, 앞에서 기술한 간송이 창립한 고고미술동인회의 발기에 동참하였던 동빈 김상기(東濱金庠基, 1901-1977)·이홍직·최순우·김원룡 등 간송의 동료와 지인들과 유족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서서히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여, 1966년에 장남 성우와 최순우·김원룡·황수영·진홍섭 등이 발기인이 되어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차남 전영우(全暎雨)가 연구소장으로, 혜곡의 소개로 가헌 최완수(嘉軒 崔完秀, 1942~)가 연구실장으로 영입되어, 간송의 수장품에 대한 정리와 연구작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어 간송이 수집한 많은 수장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면서, 이 문화재들을 국민들에게 알려서 한국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미술적 예술적 가치를 알게 하고, 나아가서 간송의 문화보국(文化保國) 업적을 기리는 전시회가 필요함을 모두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간송이 1938년 북단장(北壇莊) 권역 내에 건립하였던 조선 최초의 사립박물관이었던 보화각(葆華閣)을 1971년에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개명하고, 1971년 가을부터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주제별로 선별된 문화유산 그림·서예·서화·도자기 등 실물전시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제1회 겸재 정선(謙齋 鄭敾) 전시회’를 1971년 10월에 개최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로서 부속 간송미술관의 전시회 개최, 도록집(圖錄集) 발간 외에 다음 정리본을 출판하였다.

1965년 가을부터 고미술품 및 전적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고간송전형필수집서화목록(故澗松全鎣弼蒐集書畵目錄) 상·하권을 간행하였고, 1967년에는 수만 권의 도서 중 2천여질의 장품들을 모아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추사명품첩(秋史名品帖), 겸재명품첩(謙齋名品帖) 등을 편찬하였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활동은 지금까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 배종우 경희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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