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의 간송문화(澗松文華)를 탐하다 -8
소장학자 문화재·미술사 연구 독려
[의학신문·일간보사] 해방 이후 간송이 공식석상에 참석하는 자리는 오직 문화재보존위원회 뿐이었다. 미군정시절의 고적보존위원회 시절부터 위원회 위원으로 위촉 받아 활동했던 모양이다. 당시 간송만큼 문화재 보존 문제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과 투철한 의식을 가진 이는 없었을 것이며, 수집보호에 이르러서도 간송을 능가할 인물은 없었을 터이니 문화재 보존을 위한 자문위원회에 간송이 빠지고서는 그 위원회 자체가 성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후 고적보존위원회가 문화재보존위원회로 바뀌면서도 간송은 계속 제1분과와 제2분과 위원을 겸임하는 유일한 겸임위원이었다. 간송은 한국전쟁을 거치고 나서 우리 문화재가 전쟁의 화를 입어 곳곳에서 무참히 파괴된 것을 너무 안타까워했기 때문에 간송답지 않게 위원회에는 열심히 나가고 고적보존과 문화재 보호에 앞장서기 위해 장기간에 걸친 고적조사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1954년부터는 당시 국립박물관의 간부들이던 남운(南雲) 이홍직(李弘稙, 1909-1970), 혜곡 최순우, 초우(蕉雨) 황수영(黃壽永, 1918-2011), 수묵(樹黙) 진홍섭(秦弘燮, 1918-2010),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 1922-1994) 등과 깊이 사귀게 되는데, 특히 최순우와 황수영은 매일 만나다시피 하였다.
그 중에서도 최순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날 정도로 지기(知己)를 허하여 보화각에 함께 와서 전쟁 중에 난장판이 된 문화재들을 같이 정리하기도 하고, 종로4가 자택에서 피난을 함께 다녀온 일급문화재들을 감상하며 감식안을 높여 주기도 하였는데 어느 곳을 가거나 주흥이 도도하도록 술을 마시는 것도 정례 행사였다.
간송은 어질고 후덕한 인품으로 이들 소장학자들을 항상 보살피고 격려하며 함께 어울려 혹은 술을 마시고, 혹은 고적을 답사하고, 혹은 문화재를 감상하는 것 자체를 즐기고 있었으니 이들 소장학자들이 추종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간송의 곁에는 이들이 떠날 새가 없었다.
간송은 시문서화가 수준급에 이르렀던 전통의 문한지사(文翰之士)였다. 다만 전문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을 뿐, 높은 안목만큼이나 그림과 글씨가 맑고 뛰어났으니 ‘고당추효(古塘秋曉)’나 ‘선학괴석’ 등은 품격이 남다르고 필묵의 기초가 단단하여 보통 서화가로 자처하는 이들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글씨는 한석봉체를 익혀 호방장쾌했으니 간송의 진중하며 활달한 성품을 그대로 반영한다. 간송의 글씨 수련과정은 30세 때인 1935년에 ‘한석봉천자문’을 임서한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시(詩) 역시 한시를 즉흥으로 배율(排律)할 정도였고, 문(文)은 고금문체(古今文體)를 자유로이 구사했으니 신문과 잡지에 쓴 수필이나 단문 같은 데서 번득이는 문기(文氣)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간송이 이런 아취 있는 문사(文士)였기 때문에 간송의 꿈은 북단장 주변에 이들 소장학자들을 모두 모여 살게 하면서 보화각을 중심으로 그곳에 수장된 문화재와 장서를 이용해 마음껏 우리미술사를 연구하게 해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만 아니었으면 간송의 꿈이 이루어졌을 텐데 다 차린 밥상이 엎어진 허망한 상태에서 간송은 현재 형편으로라도 힘닿는 데까지 그 꿈을 이루어보자고 생각하여 1960년에 고고미술동인회의 결성과 동인지 ‘고고미술’의 발간이라는 쉽지 않은 일을 이루어 내었다.
간송이 국립박물관의 학자들과 어울리며 고고미술동인회를 이끌어 가던 시기는 간송에게 있어서 평생 처음 재정 압박을 받는 그런 때였다. 1950년 2월 2일 국회에서 농지개혁법안을 수정 통과시켜 소작인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地價)증권을 발행해 토지대금을 국가에서 대상(代償)하기로 했으나 뒤따라 터진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 화폐가치는 한정 없이 추락해 이 지가증권이 휴지 조각으로 변해 버렸으므로 대지주이던 간송은 일시에 대가 없이 농지를 상실 당한 꼴이 되었고, 일체 유동자산은 전란으로 소멸했으니 재원이 고갈된 셈이었다.
이런 형편에서도 간송은 보화각에서 잃어버린 문화재들을 거금으로 다시 사들여야 했으니 그 형편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간송은 그 궁색한 내색을 한 번도 비쳐 본 적이 없었다. 어려운 중에도 고고미술동인회를 이끌어가는 데는 추호도 차질이 없었고, 고고미술동인들과 어울려서는 그런 세속의 일들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음은 물론, 매달 내는 ‘고고미술’에 원고를 거르는 적이 없었으며, 그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했었다 하니 과연 간송은 이 나라 문화재 수호를 위해 태어난 수호신다운 대인이었던 모양이다.
이에 간송이 1962년 1월 26일 급성신우염(腎盂炎)으로 갑자기 타계했을 때 이들은 모두 땅을 치며 통곡하고, 하늘을 우러러 원망하며 이 나라 국운이 막힘을 한탄했었다. 그래서 ‘고고미술’ 제19·20 합집을 간송 추도(追悼)호로 간행해 간송의 업적을 기리며 애도했다. 간송과 지기를 허하던 김상기·이상백·박종화·이홍직·예용해·김원룡·김두종·박정휘·최순우 등이 가슴이 미어지고 목이 메는 슬픔으로 간송의 장서(長逝)를 애도하는 글을 써 싣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당시 이 나라 문화계를 주도하던 중심인물들이었다.
간송이 돌아가자 간송의 문화재 수호와 육영공적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는 1962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문화포장(大韓民國文化褒章)을 추서하고, 뒤이어 1964년 11월 13일에는 대한민국문화훈장국민장(大韓民國文化勳章國民章)을 다시 추서한다.
1965년에는 간송 측근의 고고미술동인들인 김상기·이홍직·최순우·황수영·진홍섭·김원룡 등이 발기인이 되어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할 것을 발기하고, 보화각을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개칭하여 부속박물관으로 하기로 한다.
1966년 4월부터는 서울대 미대를 나와 다시 서울대 고고학과를 편입해 졸업한 4남 영우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간송미술관 유물을 정리하기 시작하니 간송의 평생 사업이 비로소 제대로 이어지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훼손된 문화 자존의식을 되살려내는 작업이었고, 이로써 우리는 문예부흥의 기준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진정 간송이 바라던 바였을 것이다.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 배종우 경희대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