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의 간송문화(澗松文華)를 탐하다 -7

간송미술관

기와집 열채 값으로 ‘훈민정음 원본’ 구입

[의학신문·일간보사] 간송이 35세 나던 해인 1940년 2월 11일에는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이 내려져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으로 흡수되는 위기를 맞았던 해였다. 이미 1938년부터는 일제가 학교 교육과목에서 조선어 과목과 한문 과목을 폐지하여 언어말살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었는데, 이제 일본어 상용과 창씨개명이라는 극한의 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게 되니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던 우리민족의 찬란한 문화전통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에 간송은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고종의 뜻을 받들어 개교했었던 보성고보(普成高普)가 경영난에 봉착하여 폐교의 위기를 당하게 되자 60여만원의 거금을 쾌척하여 재단을 인수하였다.

간송이 이처럼 막대한 출혈을 감내하면서도 보성을 인수한 것은 우민정책(愚民政策)으로 우리민족을 영원히 노예로 만들려는 일제의 교육정책에 항거하여 우리민족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다.

또한 오세창이 보화각 정초명에서도 밝혔듯이 우리문화를 이어줄 배다리 구실을 하기 위해 문화재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초유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세워 우리 전통문화를 연구 복원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는 이를 바탕으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일에 종사하는 인재의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록 그 일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깨닫고 장차 민족문화 재창조의 건전한 역군이 되게 하여 광복의 주춧돌이 되고, 광복 후에도 민족문화가 단절되는 불행을 겪지 않게 하려는 더 큰 뜻이 있었을 것이다.

이 해 여름에 간송에게 또 다시 큰 임무가 주어진다. 간송이 7월 중순 오후 석양녘에 우연히 한남서림에 들러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책 거간으로 유명한 어느 인사가 모시 두루마기에 바람을 일으키며 그 앞을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바쁜 걸음을 하는 것은 반드시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간송은 이순황에게 급히 책 거간을 불러 오도록 했다.

훈민정음 국보 70호 (간송미술문화재단)
훈민정음 국보 70호 (간송미술문화재단)

책 거간에게 들은 사연인즉,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책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그 돈의 액수를 물으니 기와집 한 채 값인 1천원이라 한다. 간송은 아무 소리 않고 돈 1만1천원을 내주며 ‘1천원은 수고비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원본이 간송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려고 2년 뒤인 1942년 10월에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한글학자들을 일망타진한 일제의 손에 이 유일무이한 문화재가 넘어갔다고 생각하면 아슬아슬한 느낌이 드는 사건이었다. 이 후에 간송은 당시로서는 유일본이던 ‘동국정운(東國正韻)’ 권6의 1책과 지금도 유일본인 ‘금보(琴譜)’ 1책 등 희귀전적을 계속 구입해 들인다.

간송은 같은 해 12월 29일에 4남 영우(暎雨)를 얻는다. 이 아들이 장차 간송의 평생사업이던 문화재 수호와 연구사업을 계승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이끌어 가게 된다.

이 시기에 탄압정치를 무지막지하게 강행하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보화각을 한번 보고 싶다는 청을 해 왔다. 총독비서장 스즈키의 부탁을 받고 훗날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내는 김승현(金承鉉, 1911-1993) 박사가 간송에게 조선총독의 청을 전달하니 간송은 마지못해 허락했으나 총독이 막상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 한다. 당황한 김승현이 간송에게 달려 올라가 보니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더란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총독을 맞이하여 보화각을 안내해 보이고 응접실에서 홍차를 대접해 돌려 보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하고 조선 13도 산천초목을 떨게 하며 이천만 조선민족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조선총독이 이렇게 간송에게 하찮은 대접을 받고도 절에 온 색시처럼 다소곳이 기다릴 대로 기다리다 보여 주는 대로 보고 갔으니 간송의 기개가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국전쟁 참화

간송은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는 문화재 수집을 거의 중단한다. 광복된 조국에서는 누가 수집하여 소장한다 해도 우리 문화재를 우리 민족이 수집하고 소장하는 것이므로 더 이상 이를 수집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동족간의 이념대립으로 서로를 죽이는 비극이 전개되며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과 중공군이 남북에 각각 개입하면서 밀고 밀리는 전쟁이 계속되어 서울이 두 번씩 주인이 바뀌는 전쟁터로 바뀌게 되자 우리 민족문화재는 일제 36년 동안보다도 더 혹심하게 파괴당하고 사라진다.

간송의 보화각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북단장은 인민군 기마부대에게 징발당해 나라 제일을 자랑하던 정원이 일거에 폐허로 변했고, 보화각 소장품은 인민군의 전세가 불리해 지면서 북쪽으로 이송하기 위해 간편하게 포장되기 시작했다.

그 수많은 세월과 엄청난 재력, 그리고 열성을 다 바쳐 모아들인 다음 정성스럽게 손질해 오동상자 하나하나에 차근차근 넣어 깊이 보관되었던 민족문화재의 정수가 수난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용물만 꺼내져서 큰 목통 속에 두서없이 포개지고 못질 당했다.

이 작업을 직접 담당한 것은 뒷날 국회의원을 지낸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1-1981)과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였는데, 이들의 기발한 재치로 다행히 보화각 물건들은 북송되는 참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주게 되었고, 간송은 인민군 치하에서 포장해 놓은 그대로를 가지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미국 헌병이 호송해 열차편으로 부산에 내려진 문화재들은 김승현 박사가 빌어쓰던 중구 영주동 가자마 별장에 보관되고 간송의 차남 경우(景雨)가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이 수복되어 환도한 뒤인 1953년 10월에 간송이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문화재들을 서울로 옮겨온 지 10일 만에 이 별장에서 불이나 별장 전체가 전소했다고 한다. 참으로 또 한 번 참화를 당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난리 북새통에 겨우 포장해 끌고 간 문화재만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을 뿐 북단장에 가득 남겨 놓고 떠난 것들은 참화를 면할 수 없었다. 간송은 우선 겸재·단원·혜원·추사 등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 중 으뜸가는 분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해서 고려자기와 조선자기 등 우리 문화재만을 가지고 떠났던 것이다.

대부분의 중국서화나 중국자기를 비롯해서 그 밖의 서화 골동품 등은 두고 떠났었고 수만 권 장서도 그대로 표구소하던 한옥에 가득 쟁여 놓고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간송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서울에 남겨 놓고 온 물건 중의 일부가 부산에 먼저 내려와 있을 정도였었다 하니 그 때의 정황을 대강 짐작할 만하다.

일제 36년의 암흑기에 우리 전통문화를 단절시키지 않게 하려고 10만석 재산의 전 재력을 기울여 수집한 찬란한 문화재들이 우리민족의 손에 의해 허무하게 파괴된 현장을 목격했을 때 느껴야 했던 간송의 비애와 고통이 어떠했었겠는가. 이제는 다시 모을 수 없는 진본과 희귀본들이 전쟁의 와중에 불쏘시개로 사라지고, 창호지나 벽종이로 산산이 흩어져 버렸으니. 그러나 간송은 대인이라 이것도 국운이고 민족운이겠거니 생각하고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그 혼란 속에서도 다시 우리 문화재 수집에 나서 자신에게서 흘러나간 것들을 다시 사 모으기 시작하였다.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 배종우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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