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의 간송문화(澗松文華)를 탐하다 -9
대학시절 ‘문화재 보호 민족적 대임’ 새겨
[의학신문·일간보사] 앞에서 간송의 위대한 일대기와 시진을 보았고, 간송의 문학적·미술적 안목과 솜씨로 만들어진 자신의 그림·서예·도예작품도 감상하였다.<온라인(www.bosa.co.kr) ‘의학신문과 함께하는 예술산책’ 참조> 이번호부터는 그의 생애에 이룩한 업적들을 항목별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 업적 부분의 내용들은 간송문화(澗松文華) △41호의 간송선생 평전 △51호의 간송이 문화재를 수집하던 이야기 △55호의 간송이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하던 이야기 △70호의 간송 전형필 △96호의 간송 전형필 평전 △94호의 보화각 1938년 등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이를 기초로 하여 정리된 내용을 소개한다.
24세 젊은 나이 때 간송의 재력
간송의 문화재 수집과 보관 과정에서 간송 본인의 결심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겠지만, 이를 실천하는 데는 방대한 금전적인 재력이 뒷받침 되어야했다. 즉 간송의 재력은 매우 중요한 반석이었고, 이 재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뛰어난 안목 속에서 문화보국를 실천하게 된 것이다.
간송의 재력에 대해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간송의 증조부인 전계훈(全啓勳, 1812-1890)은 배오개(종로4가) 상권을 거의 장악하여 그 이득으로 왕십리·답십리·청량리·송파 가락동 일대와 창동 일대 등 서울 주변을 비롯해서 황해도 연안과 충청도 공주·서산 등 각처의 농지를 구입해 수만 석 추수를 받는 대지주였다.
간송의 친부인 옥포 전영기(玉圃 全泳基, 1865-1929)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고, 종로 일대에서 전채(錢債)와 상권을 쥐고 있으면서 수만석 지주로 군림하였다. 간송은 두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서 아들이 없는 작은 아버지(숙부) 두남 전명기(양부, 全命基, 1870-1919)의 양자로 가는데, 궁내관참서관(宮內官參書官)을 지낸 두남의 재산 또한 수만석이었다.
이런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면서 간송은 지금의 효제초등학교의 전신인 어의동보통학교(1921년)와 휘문고보(1926년)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다(1930년, 간송 25세). 즉위의 생부와 숙부 사이의 가족관계에서 간송은 큰 재력을 물려받는 행운아이었다. 생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백씨(伯氏, 출생으로 따지면 친형님) 전형설 (1892-1919)이 1919년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요절하게 되니, 간송은 부친 형제 사이의 유일한 혈육으로 양가의 재산을 아울러 상속받게 된다.
양부인 전명기는 간송이 14세가 되던 해인 1919년에 50세 나이로 그의 백씨(친형) 전형설과 함께 이미 돌아갔고, 친부인 전영기는 간송이 와세다대학의 졸업반 때인 1929년에 돌아가서, 간송은 졸지에 24세의 대학생일 때에 양쪽 집안의 재산을 합쳐서 10만석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조선 제일 갑부가 된 것이다.
문화유산 수집의 중요성 인식
간송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우리 문화재의 수집 보호가 가장 큰 당면 문제라는 투철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같이 지내고, 휘문고보 선배인 외사촌인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1901-1981, 월탄의 고모가 간송의 모친)와 같이 지내면서 문인의 폭을 넓혔고, 간송이 휘문고보 시절 미술교사였던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이 간송의 심미안(審美眼)과 모집벽(募集癖)을 일찍이 간파하고, 문화재 수집 보호의 민족적 대임(大任)을 그에게 맡기고자 하여, 간송이 대학에 입학하여 민족의식에 눈떠 가는 간송을 데리고, 이미 민족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신명을 다 바치고 있던 선각자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에게 가서 배우도록 하였다.
이를 계기로 젊은 간송은 이미 환갑을 지난 위창의 엄청난 양의 우리 문화유산 자료들을 보면서 위창의 가르침 속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과 자긍심을 가슴 깊이 간직하는 청년 간송의 희망과 열정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기필코 이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내 모든 것을 바쳐 지켜 내리라. 이것이 금생에 내게 맞겨진 임무다”라고 결심한 간송은 방학만 되면 귀국하여 위창 곁에 붙어살다 시피하며 안목을 길러 가게 되는데, 이때 간송의 나이는 23세, 위창은 65세, 춘곡은 43세이었다. 위창은 간송의 한 평생 스승이었으며, 향후 북단장, 보화각 설립의 중추적인 조언가 이었고,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서 감식과 품평 등에서 실로 가장 큰 조언을 한 어르신이었다.
본격적인 문화유산 수집 시작
간송은 1930년 25세로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게 되자, 곧바로 문화재 수집 계획을 세우는데, 이의 실천은 부친의 삼년상(三年喪)이 끝나는 1931년(간송 26세)부터이다. 1932년에 간송은 조선말부터 이름을 떨치던 고서점인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이를 통해 고서(古書)와 서화(書畫)를 본격적으로 구입하는 창구로 이용하였다. 한남서림은 조선말부터 백두용(心齋 白斗鏞)이 당시 석학들의 후원을 받아서 수십 년 경영하던 한국 최대의 노포(老鋪)의 하나로서, 간송이 이 서점을 인수함으로서 본격적인 수집의 창구로 이용하였다. 인수 후 처음에는 친척 조카에게 운영을 맡겼다가, 그 후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서 많은 도우미 역할을 하는 이순황(李淳璜)에게 1933년 경영을 맡겨 운영한다.
간송이 젊었을 때 수집한 명품
1933년(간송 28세)부터 1938년(간송 33세)까지 간송은 좋은 명품들을 많이 수집한다. 그 중 명품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필자가 이 기간에 수집된 명품들을 간단히 제목만이라도 소개하는 것은 뒤에서 설명될 보화각 설립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즉 많은 수집품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박물관의 필요성이 생기게 된 이유를 알수 있다. (간송의 수집품 중 문화재 지정품의 리스트는 따로 뒤에서 정리할 예정이다).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금강산 그림책(보물 1949호) △촉잔도권(蜀棧圖卷):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의 길이 8미터의 대관산수도권(大觀山水圖卷 보물 1986호)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高麗靑磁象嵌雲鶴文梅甁, 일명: 천학매병 千鶴梅甁, 고려청자 최고명품, 국보 68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해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풍속화(風俗畵 30면, 국보 135호) △청자기린형뚜껑향로(靑磁麒麟形蓋香爐 국보 65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靑磁象嵌蓮池鴛鴦文淨甁 국보 66호) △청자압형(오리모양)연적(靑磁鴨形硯滴 국보 74호) △청자모자원형연적(모자원숭이모양)연적(靑磁母子猿形硯滴, 국보 270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靑磁象嵌葡萄童子文梅甁 보물 286호) △청자상감국목단당초문모자합(靑磁象嵌菊牡丹唐草文母子盒 보물 349호) △백자박산개향로(白磁博山蓋香爐 보물 238호)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 배종우 경희대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