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신문·일간보사]
간송 서예 ‘대개창호’(大開窓戶, 1957년)
大開窓戶看雲生(창문을 크게 열고 구름 치는 것을 바라보다), 지본 (출처: 澗松文華 41, 8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서예 ‘목정암’(木精庵, 1958년)
木精庵, 蕙谷寄來紫煙文林, 書此委報(혜곡이 자연 문림을 가져와서,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한다). 간송이 혜곡 최순우에게 써준 현액이다. 지본 (출처: 澗松文華 8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서예 ‘초우장’(蕉雨莊)
간송이 동료 초우 황수영(蕉雨 黃壽永에게 쓰 준 현판 글씨이다, 지본 (출처: 澗松文華 41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서예 ‘방한석봉천자문’(倣韓石峯千字文)
간송은 문인의 품격과 소양을 갖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알고 지켜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간송이 30세 때인 1935년에 ‘한석봉천자문’을 정성스럽게 따라 쓴 것으로, 전문 서예가 못지않은 빼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지본 (崔) (출처: 澗松文華 70, 80.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서예 ‘행서’(行書)
간송 서예 ‘행서’(行書)
만리풍범수착천(萬理風帆水着天)
사매풍미과천년(麝煤風尾過千年)
창강진야홍관월(滄江盡夜虹貫月)
정시미가서화선(定是未家書畵船)
지본 (출처: 澗松文華 51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도예 ‘백자청화북단산장재떨이’(白磁淸畵北壇山莊烟缸)
간송은 1958년 전후 시기에 북단장(北壇莊) 동북쪽 비탈 개울가에 백자 가마를 차리고 서양화가이자 도예가인 정규(鄭圭, 1923-1971)로 하여금 백자를 빚어내게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백자를 빚어보기도 하였다. 이 재떨이는 그때 간송이 직접 빚어낸 것이다. 북단산장이라는 해예체(楷隷體)의 정중한 청화글씨는 틀림없는 간송 글씨이다 (崔) (출처: 澗松文華 51, 86,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도예 ‘백자동화닭그림단지’(白磁銅畵鷄文亞壺)
이 단지 역시 북단장(北壇莊) 백자 가마에서 간송이 빚어낸 것 중의 하나이다. 붉은빛 동채(銅彩, 구리 채색)로 장닭 한 마리를 그릇 표면에 가득 차게 그려 놓았는데 간송의 솜씨가 틀림없다. 1958년 정유(丁酉년 닭띠해이니 이 해 설날을 경축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 같다. (崔) (출처: 澗松文華 86,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대구간송미술관)
간송 도예 ‘분청사기 문진’(文鎭)
간송이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분청사기 문진(文鎭). 현재 3대째 사용하고 있다. (출처: 간송미술관, 중앙일보 기사 2015년 11월 11일, 주: 문진(文鎭):. 책장 또는 종이 쪽이 날리거나 넘어가지 않도록 눌러 놓는 문방구의 하나)
간송 도예 ‘화개만국춘’(花開卍國春)
간송은 1958년 전후에 북단산장 근처에 가마를 짓고 서양화가이자 도예가인 정규(鄭圭, 1923-1971)에게 백자를 빚도록 했다. 이 작품은 백자동화 닭그림 단지, 재떨이 등과 함께 빚어낸 것 중 하나이다. 청화 안료를 사용한 글씨로 화개만국춘 (꽃이 피어 온 나라에 봄이네)을 적었다 (출처: 간송의 방, 대구간송미술관)
간송 글씨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간송을 광복 이후 보성중고등학교 졸업식을 항상 3월 1일에 거행하게 하고 반드시 기미년(1919년) 3월 1일에 민족대표 33인이 선포했던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한다. 그때 낭독했던 간송 친필의 독립선언서이다. 위창 오세창이 33인 중 1인이며, 간송의 문화재 수집 후견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崔) (출처: 澗松文華 86,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원고 ‘고려청자와 죤가스비’(澗松肉筆原稿)
간송이 1957년 9월호 신태양(新太陽, 월간잡지)에 실었던 육필 원고이다. <고미술품수집여담(古美術品蒐集餘談) 죤갓스비씨 이야기> 중 초고(初稿) 첫 장이다. (崔) (출처: 澗松文華 86,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고고미술(考古美術) 창간호와 간송 2주기 기념호)
광복 이후 간송은 한국미술사 연구를 독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미술사학자들인 황수영, 최순우, 정영호 등과 함께 1960년 고고미술동인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 해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하여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학술지를 발간하는데 그것이 바로 <고고미술>이다. (출처: 澗松文華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대구간송미술관, 대구간송미술관)
간송 인장(澗松 印章) 오세창, 전수철, 제백석 외
간송이 평소에 쓰던 인장들이다. 새겨진 글은 간송의 호와 이름, 거처하던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다. 간송도 전각에 능했지만, 이 인장들은 오세창과 중국의 화가이자 전각가인 전수철(첸쇼우티에 钱瘦铁 1897-1967), 제백석(치바이스, 齊白石 1860-1957) 등이 선물한 것이다. 간송의 교유관계가 얼마나 광범위 했는지를 보여주는 유품이다. (출처: 澗松文華 86,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대구간송미술관)
간송의 다른 호(號) 옥정연재(玉井硏齋) 현판 (오세창 글씨)
간송의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옥정연재(玉井硏齋)이다. 호 중의 하나인 옥정연재 현판은 위창 오세창의 글씨이다. 현재 <간송 옛집(옛 가옥)>의 현판으로 남아 있다 (출처: 澗松文華 41호, 간송 옛집)
1. 간송의 연혁: 시대별 사진으로 설명
2. 이현서옥(梨峴書屋): 앞에서 설명한 간송 자신의 그림, 서예 작품 중 중요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간송이 머물던 집을 이현서옥이라 불렸으며, 당대의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문화를 나누는 문화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대구간송미술관 설명): 梨峴이란 우리말로 배우개이니 즉 간송이 이전에 살던 종로4가 부근이다.)
3. 옥정연재(玉井硏齋): 우물은 퍼 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 글을 쓰는 집이라는 뜻. 간송의 학창시절 서재의 이름이며. 간송의 호 중의 하나이다. 옥정연재 현판은 위창 오세창의 글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