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신문·일간보사]
앞에서 살펴본 간송의 생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간송은 한평생 그 많은 명품을 수장하는 혜안을 가지고 노력해서 나라의 보물을 지켜낸 선구자이다. 간송은 훌륭한 스승과 동료, 제자들과 교유하면서 그림·서예·도예·전각(篆刻) 등에서도 전문가 수준 이상으로 탁월한 시문화(詩文畵)가 상승(上乘)에 이르렀던 전통적인 문한지사(文翰之士)이었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간송 자신의 그림·서예·도예 등의 작품을 살펴보고, 그의 문기(文氣)의 사향(麝香)을 감상해보기로 한다.
그의 작품은 현재 대구간송미술관의 상설 전시관인 ‘간송의 방’에서 1) 이현서옥(梨峴書屋, 간송이 머물던 집을 이현서옥이라 불렸으며, 당대의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문화를 나누는 문화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출처: 대구간송미술관, 주: 梨峴이란 우리말로 배우개이니 즉 간송이 이전에 살던 종로4가 부근이다) 2) 옥정연재(玉井硏齋, 우물은 퍼 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 글을 쓰는 집이라는 뜻으로, 간송의 학창시절 서재의 이름이다. 간송의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옥정연재(玉井硏齋)이다. 호 중의 하나인 옥정연재 현판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글씨이다. 원본은 간송미술관 보관이고, 현재 간송 옛집(옛 가옥)에 복사현판으로 남아 있다. (주: 참고로 아래 작품의 해설에서 (崔)로 표시되어 있는 것은 최완수(崔完秀 1942년생) 간송미술관 전 실장의 설명이다.)
말미의 첨부 사진은 2002년 6월에 발행된 韓國文化史學會가 발행한 ‘文化史學 제 17호: 澗松 全鎣弼先生 四十周忌追悼特輯’에 실린 간송 선생 약력, 저술목록, 묵적(墨蹟), 추도 관련 기사(1962년)의 총정리 요약본을 첨부한다. 많은 업적을 정리한 귀중한 자료이다.
간송 선생이 남긴 유물에는 그가 수집하고 보존한 우리 선조들의 문화유산도 많지만, 간송 자신의 삶과 예술을 보여주는 유물들도 있다. 비망록, 친필 에세이, 서화, 전각(篆刻) 들이 포함된 이러한 유물들은 간송이 우리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쏟은 열정과 노력, 폭넓은 교유관계, 당시의 시대 상황과 문화계의 이면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간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화맥을 이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제자답게 어느 예술가 못지 않은 단단한 기초와 빼어난 감각을 소유하고 있었다. 간송이 직접 쓰고 그림 서화와 손수 빚은 도자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던 간송의 모습에서 전통적인 문인 예술가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출처: 간송 전형필, 조선회화명품전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 2018년 6월 16일- 9월 16일, 대구미술관) 전시 벽에서 간송의 소개 부분에서 발췌>
(前略) 간송(澗松)은 시문화(詩文畵)가 상승(上乘)에 이르렀던 전통적인 문한지사(文翰之士)이었다. 다만 전문적으로 자처하지 않았을 뿐, 그의 높은 안목만큼이나 청아고고(淸雅孤高) 하였으니 그림 글씨에서 일기(逸氣)가 격외(格外)에 넘쳐나고 필묵(筆墨)의 기초가 단단하여 보통 서화가로 자처하는 이들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었다.
닭은 그리면 닭 울음 소리가 들리고, 소를 그리면 쇠똥 냄새가 나는 듯 그렸으며, 양 떼를 그리면 초원의 훈풍을 연상케 한다.
글씨는 소미체(蘇米體)를 익혀 호방장쾌하고 진중하여 활달한 성품을 대변하는 서체이다. 시(詩) 역시 한시(漢詩)를 즉흥으로 배율(排律)할 정도이었고, 문(文)은 박람정독(博覽精讀)하여 고금문체(古今文體)를 자유로이 구사하였으니 주로 환도 후인 1953년 이후부터 신문과 잡지에 쓴 수필이나 단문(短文) 같은 데서 번뜩이는 문기(文氣)를 사향(麝香)처럼 느낄 수 있다. (後略) <출처: 澗松文華 41호 崔完秀의 澗松 先生 評傳과 86호 崔完秀의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 편전(評傳),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발췌>
간송 그림 ‘방고사소요’(倣高士逍遙, 뜻 높은 선비가 거닐다, 1956년)
간송은 추사, 완당(秋史 阮堂 김정희 金正喜, 1786-1856)의 심화에 공명(共鳴)하여 추사의 고사소요(倣高士逍遙)를 그대로 임모해 내었다. 추사 그림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방불하다. <병신소춘절(丙申小春節, 방완당선생법(倣阮堂先生法) 1956년 1월 1일에 완당(阮堂) 선생법을 모방하다>는 방서를 남기고 있다. 지본수묵, (崔) (출처: 澗松文華 41, 70, 82, 86,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의 그림 ‘향원익청’(香遠益淸,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
막 피어나는 연꽃 한 송이와 연밥 하나가 그림의 전부다. 분홍색 연꽃잎 안에 노란 꽃슬이 보이고 씨방의 녹색 점이 점점이 찍혀있다. 꽃대와 연밥 모두 하엽록(荷葉綠, 연잎 색깔의 짙은 목색)으로 처리했는데 가시의 표현이 억새다.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풍의 절지화(折枝畵, 꺽은 꽃 그림)로되 팔대산인보다 더 간결해서 고금서화 감식에 탁월한 안목을 내장하고 있던 간송의 기량을 짐작하게 해준다, 지본담채(崔) (출처: 澗松文華 51, 70, 80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그림 ‘고당추효’(古塘秋曉, 오래된 못가의 가을 새벽)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에 비길만큼 극도로 정제된 필묵(筆墨)과 채색으로 오래된 연못가의 새벽 정취를 묘사해낸 일품화(逸品畵)이다. 다만 소나무 한 그루 단풍 든 활엽수 한 그루가 언덕 아래 서 있고 못가에 초가집 한 채가 있는 쓸쓸한 풍경인데 저 건너에 야트막한 야산이 떠 있어 그 사이 빈 공간이 연못인 줄 알겠다.
소나무도 늙어 고목이 된 듯한 가지는 다만 셋뿐이고, 그나마 모두 늘어져 있다. 단풍든 활엽수 역시 기둥 위에 몇 잎 잎새를 부쳐 놓은 듯 단조롭고 초가집은 저보다 더 작은 집이 있을까 할 정도로 앙증맞다. 채색은 다만 군청(群靑)과 연지(臙脂) 두 색만을 썼는데 농담의 변화로 다양한 색채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고당추효(古塘秋曉)라고 화제를 적었다. 지본담채 (崔) (출처: 澗松文華 41, 70, 86,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그림 ‘선학괴석’(仙鶴怪石, 신선학과 괴상한 돌)
뭉게구름이 피어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이 뒤틀며 용솟음쳐 오르는 것 같기도 한 괴석 뒤로 파초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곁에 학 한 마리가 무심히 서 있는 그림이다. 학은 호의현상(縞衣玄裳, 흰 옷과 검은 치마)으로 새하얀 몸체에 검은 꼬리를 갖추었고 머리에 붉은 벼슬을 단 단정학(丹丁鶴)인데 허공을 향한 부리가 유난히 길어 기다림에 지친 듯하다. 파초는 다만 두 잎만 나고 새순이 용수철처럼 돋아나고 있다. 아직 봄기운이 덜 가신 듯 연두빛 일색이다. 괴석과 선학에 군청과 연지색을 엷게 덧칠해서 그 색감을 돋보이게 하였다. 지본담채 (崔) (출처: 澗松文華 70, 80, 86,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그림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布袋)화상은 중국 절강성 명주(明州. 현재 寧波) 봉화(奉化)현 사람으로 성씨는 미상이고 출가하여 법명을 계차(契此, ?-916)라 했다. 몸집이 비대하고 배가 나왔으며 늘 포대를 짊어지고 다니며 빌어먹었는데 무엇이나 주는 대로 먹고 남으면 포대에 가지고 다니므로 사람들이 포대화상이라 불렀다. 사람의 길흉화복이나 날씨의 궂고 갬을 말하면 반드시 적중하고 눈 속에서 누워 자도 눈이 몸을 적시지 않는 등 기행을 일삼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때부터 그려졌던 듯하나 고려 그림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고, 조선 중기의 화원(畵員) 화가로 도석화(道釋畵)를 그리던 설탄 한시각(雪灘 韓時覺. 1621-?)이 그린 ‘포대화상’이 있을 뿐이다. 일본인 수장가인 스에마츠(末松) 가(家) 구장품과 간송미술관 수장품이 그것이다. 간송은 스에마츠家의 한시각 ‘포대화상’을 경매 도록에서 보고 그대로 방작하였는데 막상 한시각의 ‘포대화상’보다 더 세련되고 선기(禪氣)가 감돈다. 필묵의 운용이 일층 간결 담백하여 그 화격을 비교할 수 없이 높여 놓았다.
일필휘지로 포대화상을 그려내던 운필(運筆)의 여세를 몰아 설탄법을 모방했다.(仿雪灘法)고 써 놓았다. 지본수묵 (崔) (출처: 澗松文華 41, 70, 80, 86,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그림 ‘묵국’(墨菊, 1956년)
澗松醉筆. 千仞絶壁菊花生, 曲玉其人一琴間(간송이 취중에 그리다. 천길 절벽에 국화는 피었는데, 곡옥 같은 그 사람은 가야금을 타는구나).
(간송과 외사촌형인 월탄 박종화가 술 자리 취중에 간송이 그림을 그리고, 월탄이 글씨를 쓰다) 지본수묵 (출처: 澗松文華 8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그림 水仙
간송이 그린 수선화 그림이다. 지본수묵 (출처: 澗松文華 41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그림 ‘정유세화’(丁酉歲畵)
간송이 그린 닭 그림이다. 지본수묵
(출처: 澗松文華 3, 41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그림 ‘편석위양’(鞭石爲羊)
간송 그림 ‘빈우도’(牝牛圖)
간송이 그린 암소(牝 암컷 빈, 牛) 그림이다.
지본수묵 (출처: 澗松文華 41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서예 ‘선학괴석’(仙鶴怪石, 신선학과 괴상한 돌)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풍의 전서체이다. 사승(師承)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선학과 괴석을 그리고 그 화제(畵題)로 쓴 글씨이다.
지본(崔) (출처: 澗松文華 70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서예 ‘향원익청’(香遠益淸,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
역시 위창 오세창 풍의 전서체이다. 염계((溓溪) 주돈이(朱敦頤, 1017-1073)의 애련설(愛蓮設)에서 따온 문구로, 연꽃 그림의 화제로 쓴 글씨이다. 지본 (崔) (출처: 澗松文華 41, 51, 70, 80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서예 ‘아락서실’(亞樂書室)
혜곡(蕙谷) 최순우(崔淳雨, 1916-1964)의 서재 현액으로 써준 글씨다. 혜곡이 꿈에서 이 서제의 이름을 보고 써 달라고 해서 받은 것이라 한다. 활달한 동국진체(東國眞體)풍의 글씨이다. 을미(1955) 가을 내 벗 혜곡이 꿈 속에서 이 구절을 얻었다(乙未秋年友蕙谷夢中得此句)이라는 관서(款書)를 끝에 써 놓았다. 지본(崔) (출처: 澗松文華 41, 70, 80,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서예 ‘삼불암’(三佛庵)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 1922-1994)에게 써 준 현액(懸額)이다. 30세에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한석봉천자문(韓石峯千字文)을 임서(臨書)*했던 바탕 위에 소식(蘇軾, 1035-1101)과 미불(未芾, 1051-1107)의 필의(筆意)를 익힌 활달한 서체이다. 지본 (崔) (출처: 澗松文華 41, 70, 86, 92호, 간송미술문화재단) (주: 임서*: 글씨본을 보면서 쓰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