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의 간송문화(澗松文華)를 탐하다 -10

간송미술관

민족 문화유산 수집·보관·연구 터전 마련

[의학신문·일간보사]

간송 꿈의 실천 위한 터전인 ‘북단장’ 문화 콤플렉스 개설

이렇게 제일급 수준의 우리 문화유산들이 속속 간송의 수집으로 모여들자, 간송은 이의 보장(保臟)과 연구를 위한 터전 마련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시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현재 서울시 성북동 일대)에 있던 프랑스인 석유상(石油商) 블래샹의 별장을 인수하고, 그 주변 땅 1만여 평을 아울러 사들여서, 이곳에 북단장이라는 문화 콤플렉스를 개설한다. 이때가 간송 나이 29세 때인 1934년 7월의 일이다.

북단장이라는 이름은 위창 오세창이 지었으니, 이곳이 옛날 선잠단구지[先蠶壇舊址, 조선의 선잠제(先蠶祭)가 열렸던 선잠단(先蠶壇)] 부근이라 북단(北壇)의 별호로 이미 불리고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간송은 우리 민족 문화유산을 수집·보관·연구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에 이어서 1398년 이 단지 내에 보화각이라는 박물관을 건립하게 되는 바탕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북단장이 개설되자, 일찍부터 당대 유명한 서화가들과 교류하던 간송은 북단장 개설 소식을 전하며 현액(懸額)을 부탁하게 되었다. 위창 오세창, 석정 안종원(石丁 安鍾元 1874-1951), 성재 김태석(惺齊 金台錫, 1875-1952), 무호 이한복(無號 李漢福 1897-1940)을 비롯해서 일본의 서예가 나가오우잔(長尾雨山 1864-1942) 등 간송과 묵연(墨緣)으로 이어진 국내외 명가들이 자신의 특장(特長)인 서체로 쓴 현액을 증정하여 북단장 개설을 축하한다.

[사진1] 이한복의 북단장 발문 확대 (간송미술문화재단)
[사진1] 이한복의 북단장 발문 확대 (간송미술문화재단)

안종원은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과 8촌 인척인 서예가로 그는 오세창 간송과 교류하며, 북단산장(北壇山莊)이란 예서(隸書)를 남겼는데, 고아한 필치의 균제미(均齋美)를 보여주고 있다. 김태석은 오세창과 근대 전서와 전각에서 쌍벽을 이룬 분이다.

이한복은 서화예술회에서 서화를 배우고 일본 동경미술학원에서 유학한 한국 최초의 서화가이다. 뛰어난 감정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진한 초묵(焦墨)으로 북단장을 쓴 다음에 다음과 같은 방서(傍書)를 남겼다.<사진1 참조>

甲戌之秋七月旣望書於對岳樓中爲供 芝山人兄新莊補壁 [갑술년 가을 7월 16일, 대악루(對岳樓)에서 쓰니 지산(芝山)<[주: 전형필의 호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 옥정연재(玉井硏齋) 등으로, 여기서 芝山은 간송을 칭한다> 인형(人兄)의 새로운 별장 보벽(補壁·벽장식)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사진2] 북단장 권역 (간송미술문화재단)
[사진2] 북단장 권역 (간송미술문화재단)

이한복의 현액은 그 방서를 통해서 북단장 개설의 시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 더욱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들 3점의 글씨는 다음 사진과 같다.

간송은 북단장 개설 후인 1934년 이 권역 확보를 계기로 그 후에도 앞에서 설명한 문화유산 수집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즉 북단장 개설과 뒤의 보화각 설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비록 나이 30세 전후의 간송의 혜안(慧眼)과 이의 결심과 실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과정인 것에 필자는 경탄할 따름이다. 북단장 전체의 권역의 구성도는 <사진2>와 같다.

‘빛나는 보물을 모은 집’ 뜻하는 최초 사립박물관 ‘보화각’ 건립

1938년 간송(33세)은 새로운 계획을 실천한다, 북단장 안에 사립박물관을 세워 이제까지 수집한 우리 문화재의 정수를 보관·전시하며, 이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 문화의 단절을 막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 주자는 것이었다. 이미 중국침공 등 전시(戰時)체제에 돌입하여 물자통제가 되고 있는 일제 강점기에 근대식 박물관을 건립하기로 작정했으니, 그의 문화적 항일의지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 박물관이 보화각이다.

1938년 3월부터 설계가 시작되어, 동년 5월 20일부터 8월 30일까지 100일간의 공사 기간으로 완공된다, 설계는 조선인 최초로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봉직하다가, 1932년 종로 관훈동에 박길룡 건축사무소를 개설한 박길룡이 담당하였다. 그 당시 박길룡이 설계 감독한 건물 중 중요한 것은 韓靑(한청)빌딩(1935년), 구영숙소아과의원(1936년), 화신(和信)백화점(1937년), 경성여자상업학교(1937년) 등이 있다.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보화각을 설립하려는 간송의 뜻과 마음에 감명을 받은 박길룡은 건축의 설계와 감독을 맡아서, 여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훌륭히 완성하게 된다. 공사 기간에는 정식 명칭인 보화각의 사용 전이라서 설계 명칭은 ‘전형필 서화진열실 또는 북단장 양관(洋館)’이었다.

보화각 설립 부지면적은 2350평(77680m2), 1~2층 면적: 68평(213m2), 지하실 면적 11평(36.6m2), 塔屋 8평(26m2)이었다. 북단장 개설과 주택증설, 보화각 설립에 대한 각종 자료, 설계도와 해설은 2024년 4월 보화각 보수 재개관 기념으로 열린 전시회(보화각 1938) 간송문화(澗松文華) 94호에 자세히 수록되어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간송은 그 당시임에도 불구하고 이태리 대리석을 수입하여 계단 장식을 하고, 진열실 바닥을 참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고, 일본에 주문하여 중국제 진열장을 들여다 놓았다. 간송은 수시로 나와 감독하였는데, 사진으로 남아있다.

보화각 공사 진행 동안 위창·춘곡·석정 등 당대의 서화계 원로들을 수시로 초빙해서 자문을 구하고, 심전·청전 등 젊은 화가들과도 수일상봉(隨日相逢)으로 만나 의논하였다. 여기에 외사촌인 박종목(朴鍾穆)·박종화(朴鍾和) 형제가 자주 합류하였고, 한남서림 운영자인 이순황(李淳璜)도 늘 배석하였다.

보화각의 뜻은 간송이 마음에 품은 보국문화의 본격적인 행보를 상징하는 영보정화(永葆精華, 우리 문화유산의 빼어난 정화를 영원토록 보존하자)는 역사적인 건물이다. 즉 ‘빛나는 보물을 모은 집’의 의미이다. 뒤에서 설명할 위창 오세창이 쓴 보화각 상량식 정초문 중 천추정화(千秋精華), 자손영보(子孫永葆)에서 채자(採字)되어 보화(葆華)… 즉 보화각이 된다. 보(葆)자는 더부룩할 보로 빽빽하다, 덮다, 보호하다의 뜻으로 지킬 보(保)자 위에 풀 초(艹, 艸)를 올려서 더욱 잘 보존한다는 의미이다.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 배종우 경희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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