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건의료정책연구소 이사
<제주한국병원 흉부외과 과장,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지진, 기근, 가뭄, 홍수, 태풍과 같은 기후 재앙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 그 동안 문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 재해는 더 큰 혼란 (Chaos) 으로 다가온다. 지진이 기후변화의 탓은 아니지만, 얼마 전 있었던 트르키예와 시리아의 대지진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지금 이곳의 혼돈과 파국은 상상 이상이다. 그렇다고 대자연 앞에서만 무력한 게 아니다. 크리스퍼 (CRISPR) 가위를 통한 유전자 조작 등 분자 수준에서 생명 현상을 이해하고 치료법을 개발할 정도로 현대 의학은 발전했지만, 이 오만은 신종 전염병의 창궐로 처참하게 부서졌다.
게다가 COVID-19는 끝이 아니라 다른 신종 전염병 출현의 티저일 뿐이다. 이 바이러스는 불과 수년 만에 인류의 일상과 상식을 깨버렸고, 삶의 패턴도 바꾸었으며, 무엇보다 세계 경제를 요동치게 하고 있다. 판데믹 이후 외환 위기나 경제 위기에 내몰린 국가가 60개국이 넘는다는 주장이 있다. 비단, 제 3세계나 개도국만이 아니다.
미국 실리콘 밸리 스타트 업의 돈줄이었던 실리콘밸리은행(SVB)이 대규모 인출 사태 이틀 만인 지난 3월 10일 금융당국에 의해 폐쇄된 후 파산 절차에 들어갔다. 총 자산 2,090억 달러, 총 예금 1,754억 달러를 가진 미국 내 자산기준 16위 규모의 은행이었다. 같은 날 뉴욕 시그니처 은행도 뱅크런이 발생하여 3월 12일 폐쇄되어 역시 파산절차를 진행 중이다. 시그니처 은행의 총자산은 1,103억 달러, 예금은 885억 9000만 달러 규모였다. 이에 앞서 8일에는 실버게이트 캐피탈이 자발적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미국 뿐이 아니다. 3월 20일에는 스위스 정부와 스위스 국립은행이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크레디트 스위스(Credit Suisse)를 스위스 UBS 은행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한때 80스위스 프랑까지 갔던 크레디트스위스의 주가는 99% 하락해 0.8 스위스 프랑까지 떨어졌다. 크레디트 스위스의 예금 등 관리 자산 규모는 한화 약 1,700 조원에 이르며, 자산가치는 약 100억 달러에 이른 유럽 최고의 투자 은행이었다. 이 은행의 부도설은 지난 연말부터 꾸준히 나왔는데, 대주주인 사우디 국립은행이 더 이상 유동성 지원이 없다고 못 박자 주가가 폭락했고, 스위스 정부는 파산을 막기 위해 나섰다. 3월 20일 일요일, 부랴부랴 크레디트 스위스와 UBS 이사를 불러 모아 단 하루 만에 매각 결정을 내리게 했다. 크레디트 스위스의 파산으로 야기될 금융 위기를 사전에 막아 혼돈이 생기지 않게 한 조치이다. 전격적 매각에 자산 평가니 하는 정상적 매각 절차가 있었을 리 없다.
미연방 예금보험공사도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금융 기관 연쇄 부도를 막기 위해 예금자 돈을 모두 보존해주겠다고 나서며 진화에 나섰다. SVB의 파산의 원인은 따지고 보면, 판데믹이 만든 나비 효과 때문이다. 판데믹 기간 동안 미국의 현금 유동성이 급격히 늘어 스타트 업에 대한 투자가 물밀듯 몰리자, 스타트 업 등 테크 기업은이 투자금을 SVB에 예치하기 시작했다. SVB는 이렇게 늘어난 예금의 상당 금액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한 미국 국채를 1200억 달러 이상 매입해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미국 금리가 가파르게 치솟자 지불해야 할 예금 이자는 늘어난 반면, 국채 등 투자 자산의 가치는 하락해 손실이 발생했고, 이를 알게 된 예금자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하면서 약 10억 달러 규모에 대한 인출 부족이 생겨, 증자를 시도했으나 실패해 은행 폐쇄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미국 정부는 판데믹 기간 동안 뿌린 현금을 거둬들여 달러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연이은 금리 인상을 단행하고 있는데, 파산한 금융기관의 예금자 보호를 위해 다시 시중에 막대한 현금을 풀어야 할 상황에 처했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금융기관들이 연이어 파산하는 것이 금융 위기의 신호탄이라는 예측이 많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스위스 정부가 서둘러 진화에 나서는 건, 이런 ‘불량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원래 경제는 소문과 심리가 이론에 우선한다.
금융이나 경제만 위기가 아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은 이미 2년째 접어들었으나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중국의 대만 침공은 내일 당장 벌어진다 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 개입할 게 분명한데, 2019년 당시 미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해상자위대 헬기 항모인 가가(かが) 함정 위에서 선언한 국제 군사 동맹 (global military alliance)에 따라 일본 해상 자위대는 일본 근해 뿐 아니라 남중국해에서 미군을 방어하기 위해 공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도 해상 자위대로 불러야 할까, 아니면 일본 해군이라 불러야 할까.
만일 미일 연합군이 중국과 맞서 싸우게 되면, 주한 미군 중 일부, 특히 공군 병력은 이를 지원할 가능성이 크고, 남한의 전력 공백이 생기게 된다. 북한은 최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는 물론, 핵타격을 가정한 전술탄도미사일(KN-23·북한판 이스칸데르)을 발사하고 800미터 상공에서 공중폭발 시험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핵폭발 시뮬레이션 사이트 누크맵에 따르면 폭발 고도 800m에 최적화된 60kt 전술핵무기가 서울 일대에서 폭발할 경우 사망자는 23만7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미 진행 중이다. 그건 바로, 우리나라의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저출산율과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령화 속도이다. 우리나라는 60년대 한해 100만명이 출생했으나 지금은 1/4로 줄어들었다. 그 결과 매년, 남양주나 부천시 인구가 소멸하고 있다. 매년 핵폭탄이 3개씩 터지고 있는 수준이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해 말, 현재 세계 12위인 우리나라 경제 규모는 2050년 이집트와 나이지리아의 경제 규모에 밀리게 될 것이며, 필리핀에도 밀리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인구라는 절대적 자원의 부족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해결법은 안개 속에 있을 뿐이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는 최근 오피스 앱에 코파일럿(Copilot)이라는 인공지능 기능을 넣어 시연했다. 최근 Chat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큰 관심을 끌었는데, 이게 과연 실무에 도움이 될까 의심을 품었던 이들은 이 시연 동영상을 보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코파일럿은 아주 똘똘한 직원을 한 명 채용한 것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저출산율로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데 인공 지능이 한 사람 몫을 해 준다면 반가운 일일까, 아니면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대체하게 될 시대를 두려워해야 할까?
세상은 이렇게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한국 의료는 여전히 어둠을 헤매고 있다. 비대면 진료 입법화를 강력히 추진하던 보건복지위는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하지 못한 체 표류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약 배달을 우려한 약사 출신 의원들에 의해 봉쇄되었다는 소문이 돈다. 이들에게 고맙다 해야 할까, 아니면 특정 직역 감싸기라며 비난해야 할까.
그러면서 간호법과 의료인 면허취소법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태워 속전속결로 통과시키려 한다. 심지어 복지부도 “의료 현장의 직역 간 협업이 중요한 상황에서 간호법의 본회의 부의 요구는 보건의료직역 간 협업을 어렵게 할 우려가 있다"고 밝히는데 말이다.
원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긴 하지만, ‘필수의료’는 이미 한 물 간 옛 노래가 되었다. 필수의료가 아산병원 간호사 뇌출혈로 이슈화되긴 했지만, 복지부가 필수의료를 ‘‘중증‧응급‧분만‧소아환자’ 중심으로 정의하고, 전국 14개 권역심뇌혈관센터 재지정 운운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필수의료는 특정질환이나 특정과가 아니라, 국민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의료서비스이다. 그런데, 특정과나 특정 질환에 대해 더 지원해야 하는 건, 그렇지 않아도 되는 건 이미 충분히 수요도 공급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진료과나 질환은 수요가 적으니 공급도 적다. 수요가 적으니 매출도 적고, 병원은 해당 의사를 채용하려 하지 않으니 그 과를 전공하지 않으려는 거다. 이런 결과는 수가 체계가 잘못 만들어진 게 가장 큰 이유다. 상대가치점수를 계산할 때 난이도를 충분히 반영하고, 수요 없이 대기해야 하는 예비인력까지 모두 포함해서 인건비 계산을 해 점수를 상향하면 될 걸, 무슨 센터니 권역이니 하며 특정 병원에 쥐꼬리만큼 지원해주면서 줄 세우고 생색내고 규제 할 생각 뿐이다.
차라리 수가 인상은 그만두고 고질적인 심평원의 심사 관행부터 바꿔라. 전혀 의학적 근거 없는 심사기준을 남발하고 그 기준으로 삭감하는 관행은 언제 바뀔까? 수술 적응증, 치료 방식을 언제까지 교과서가 아니라 심평원 심사 기준에 따라야 하나. 삭감의 칼에 대상이 되는 건, 지원이 적다고 법석을 피는 이른바 ‘필수의료’ 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심사 기준도 제각각이다. 과거 국감에서 삭감율이 심평원 지원에 따라서 2배 차이가 난다는 지적이 있었다. 2022년 국감에서도 심평원에 대한 지적이 많았다. 예를 들어, 이의 신청하면 받아주는 비율이 58.8%라는 것이다. 일단 삭감하고 보자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 있을까?
혹자는 이런 관행이 삭감에 따른 포상제 때문이 아닌가 의심한다. 언론에 따르면 심평원은 과거 심사직 직원에게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려다가 포상제로 바꿔 시행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복지부 차관이 청구를 막을 방안으로 이를 거론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삭감 포상제를 시행하는지 알 수 없다, 한편, 지난 해 감사원은 삭감은 의료비 통제 요인이 없다는 입장을 낸 바 있다.
바야흐로 혼돈(混沌)의 시대이다. 혼돈은 상식, 일상, 규칙, 질서, 정의 또는 공리(公理)라고 믿었던 것들이 등을 돌릴 때 나타난다. 혼돈은 혼동(混同. confusion)을 가져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물과 사안이 더 명료하고 선명하게 보여야 하건만, 오히려 흐릿해진다. 왜 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