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철<br>한국보건의료정책연구소 이사<br><제주한국병원 흉부외과 과장, 의사평론가><br>
송우철
한국보건의료정책연구소 이사
<제주한국병원 흉부외과 과장,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역사(歷史)의 특징은 그것의 영속성(永續性)에 있다. 역사란 토막토막 잘려진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토대로 펼쳐지는 미래의 이야기이다. 한국 의료계의 미래는 과연 밝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올해는 광혜원(제중원)이 설립된 지 138년이 되는 해이다. 광혜원은 대한제국의 국왕이 백성을 구제하겠다며 세운 왕립 의료기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이었으며, 훗날 수많은 의사를 배출한 의학교 역할을 하였다. 제중원 의학교 등 국내 의사 양성 기관이 만들어지면서 차츰 한국인 의사가 증가하다가 한국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수의 병원과 다수의 의원을 중심으로 의료 공급이 이뤄졌다. 당시에는 의원이 의료공급의 근간이었고, 전국에 산재한 의원이 국민의 건강을 책임졌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부족해 일제시대에 거의 사장되었던 한의원을 회복시키는 건 물론, 약국의 임의 조제 (의사의 진단없이 약사의 판단으로 이뤄지는 약의 조제)도 묵인했을 뿐 아니라, 조산사의 분만도 허용했다.

혁명정부가 들어선 70년 초 천불에 불과한 낮은 국민소득, 커다란 빈부격차와 공공의료기관의 부족 등으로 국민들에게 더 나은 의료 혜택을 받게 하려면 국공립병원을 증설과 의료보험 제도의 도입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77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시작되었으나 당시 의료계는 관행 수가에 비해 턱없이 낮게 책정된 보험 수가를 큰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이유는 의료보험이 일부 직장에 대한 적용되는 제한적 보험제도라는 점, 당시 개원의는 상대적으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많은 의사들이 무의촌 진료 등 자발적 사회 봉사를 하는 것이 당연시되어 보험 환자를 진료하는 걸 국가 시책에 부응하는 동시에 봉사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라는 정도의 개념을 가졌을 뿐이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의료보험은 더욱 확대되었고, 89년에 이르러는 아예 전국민이 보험의 대상이 되었다.

전국민의료보험으로 의료기관의 문턱이 낮아지자 몰려드는 환자로 전국 병의원은 몸살을 앓게 되었고, ‘3시간 대기 3분 진료라는 용어가 언론 지상에 오르내리며 국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의료계는 관행 수가와 턱없이 차이나는 의료수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어려웠고, 오히려 정부는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기로 한 수가를 일방적으로 고시하는 것을 더욱 당연시하게 되면서, 의원 등 의료기관의 배신감과 불만은 고조되어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커져 가기만 했다.

정부는 부족한 의료공급을 채우기 위해, 병원을 지을 부지와 설계도만 있으면 병원 허가를 내 주고 대출을 허용하는 등 농어촌 지역의 병원 건립을 장려하는 지원책을 펴 적지 않은 중소병원이 설립되었고, 여러 의원도 병원으로 전환하는 등 전국적인 병원 개원이 늘어났다. 국가가 공공의료기관을 세우는 대신 민간의료기관 양성에 전념한 것이다. 어쨌든 2000년에 이르러 충분해진 병의원 공급에 따라 의료보험을 폐지하고 국민건강보험을 출범시킴과 동시에 약사들의 임의조제를 근절하기로 하고 의약분업을 실시했다. 의약분업의 명분은 의료계와 약계, 정부 모두 달랐다. 의료계는 약사가 자격을 넘어 시행하는 진단과 처방(조제)라는 월권적 행위를 막기 위해 의약분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정부는 약국에서 이뤄지는 항생제 등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의약분업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약계는 조제의 전문성을 내세우며 개원 의사들의 조제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약국의 임의 조제를 막을 경우 전국 약국은 도산할 것이라며 강력한 보상을 요구했다.

의약분업은 이해가 첨예하여 난제로 뒤덮인 정책이었지만, 결국 약계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의료공급이 부진할 때 약국이 의료기관 역할을 했는데, 이제 와서 토사구팽 당할 수 없다는 약사들의 절박함이 컸던 것이 주효했다. 의료계는 지지부진한 지도력과 의료계 내부에 복잡하게 얽혀진 종별 의료기관의 간극을 좁히지 못했고, 직역, 지역, 과별 특성 탓에 내분에 휩싸여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것에 실패했다. 당시 의약분업을 담당한 복지부 관계자는 훗날, ‘의약분업의 필요성은 있었으나 복지부 내에서도 실제 의약분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이 없었는데, 결국 의약분업이 전격적으로 합의되어 자신도 놀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완전 의약분업으로 조제권을 상실한 의원가는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또한 의약분업은 의사를 대표한 의협의 대외적 신뢰가 무너지고, 병협이 새로운 의료계 대표주자로 떠오른 계기가 되었다. 의협은 모름지기 우리나라 의학계를 대표하는 대한의학협회에서 의료법에 따른 치과의사협회, 한의사협회 등과 같은 의료인 중앙단체 중 하나로 격하되었고, 의약분업을 계기로 의료계가 아니라 의원을 대표하는 기구로 비춰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의협은 여전히 의료법에 따라 설립해야 하는법정 의료인 단체이고, 병협은 설립할 수 있는임의단체이다. 그러나 주요 대학병원, 대형병원들이 회원인 의료기관 단체이고 주요 대학병원 원장이 회장을 맡을 뿐 아니라 대체로 정부 정책에 수긍하며 따르니 정부는 말 많고 탈 많은 의협의 대체재로 병협을 의정대화의 창구로 쓰기도 했다.

한편, 건보 출범 이후 암 정책 도입과 함께 고가의 암 진단 및 치료기기와 암 병동 등에 선제적으로 투자한 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등 대기업이 출연해 만든 대형 병원의 약진이 두드러졌고, 그 뒤를 서울대, 연고대 등 주요 대학병원이 이으며, 전국에는 우후죽순처럼 암 병동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암 진단과 치료 성적은 괄목할만하게 성장하고 덩달아 평균수명 또한 비약적으로 늘어나, 현재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인데, 머지않아 국내 여성의 평균 기대 수명은 90세를 넘겨 부동의 세계 1위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수명 연장이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고령 인구의 기대수명이 늘고, 빠른 속도의 고령화로 고령인구가 급격히 늘자 전국의 요양원과 요양병원은 대기를 해야 할 정도로 붐비지만, 이곳에 수용된 이들의 상당수는 의식이 없거나 거동이 어려운 와상 상태로 비위관으로 영양을 공급받아 연명하며 다제내성균에 감염된 비율도 매우 높아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암 정책에 따라 과거에는 치료를 포기했을 상태의 환자들도 낮은 본인부담금과 날로 발전하는 신의료기술과 신약에 기대 적극적 치료를 원하는 경우가 늘어, 일부는 좋은 성과를 거두지만, 그 나머지는 결국 인생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체 마무리하게 된다. 이렇게 사실상 치료 가능성이 없으면서 약물에 의해 연명하는 환자들이 늘어나자 의료인, 약물, 기기 등 의료자원이 이들에게 집중되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존엄사란 명분을 내세워 적극적인 치료를 중단하는 법까지 제정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의사조력 존엄사의 입법안까지 나온 상태이다.

대형병원들이 암에 몰두하고 로봇 수술과 내시경 수술에 매달리는 동안 외과 의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외상 의학과 소아 수술이 홀대 받기에 이르고, 외과 의사가 개복 수술을 꺼리는 현상도 생겼으며, 병원이 대형화하면서 세부 전문의 배출이 늘어나면서 과거에는 전문의라면 당연히 치료하고 수술해야 했을 질환을 관련 세부 전문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는 사태까지 생겼다. 그러다 보니 의대 졸업생의 90% 이상이 전문의가 되고, 활동 의사의 80% 이상이 전문의인 나라에서 특정 세부 전문의가 부족해 의사를 찾아 병원을 전전하다 위독해지는 사태가 생기게 되었다.

한때 의사의 절반 이상이 개원의였으나 이제는 활동 의사의 1/3 이하로 줄었다. 그만큼 병원이 더 많이 생겼고, 더 많은 의사들이 병원으로 흡수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 의료의 근간이었던 개원의는 국가 정책에서 소외되고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현실이 되었다. 반면 대학병원 등 대형 병원은 더 많은 분원을 개원하며 규모를 키운다. 지금도 수도권의 대학병원 분원 건립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서울대는 경기 시흥에, 세브란스는 송도국제도시에, 고대는 과천, 남양주에, 아산병원은 청라국제도시에, 가천 길병원은 위례신도시에, 아주대는 평택, 파주에, 인하대는 김포에, 한양대는 안산에 대규모 분원을 예정하고 있으며, 중앙대는 이미 지난 해 광명에 분원을 개원했다. 경희대 역시 분원 설립을 검토 중이다. 이렇게 늘어날 분원은 수도권에만 최소 6천 병상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 지난 해 서울시가 조례 변경을 통해 용적율을 완화해, 삼성서울병원, 건국대, 이대목동 병원 등 10개 병원이 증축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개원 시장은 날로 열악해지고 있다. 2010년 의원의 외래요양급여 비용은 약 83천억원이었는데 2020153천억원으로 1.84배 늘어난 반면, 종합병원은 같은 기간 23천억원에서 5조원으로 2.17배 증가했고, 상급종합병원은 25천억원에서 55천억원으로 2.2배 증가했다. 지출되는 전체 건보재정에서 의원 외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57.63%에서 53.9%-3.7% 성장한 반면,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은 각각 1.7%, 1.6% 증가했다. 외래 요양기관 연평균 증가율도 2015~2020년 동안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은 9.79%. 9.07% 증가했다.

특이점이 오고 있다. 그 배경에는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절벽과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고령화와 병원 위주의 정부 정책이 있다. 과거 이 나라 의료를 위해 헌신했던 의원과 중소병원은 차츰 소멸한다. 그러나 이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는 이는 없다. 이미 정부나 의료소비자에게 의원의 가치는 대형 병원에 비해 경질환에 대한 동일 진료의 낮은 건보재정 부담 뿐이다. 그러나 미래에는 알게 될 것이다. 의원은 꿀벌과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꿀벌의 소멸은 재앙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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