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철<br>한국보건의료정책연구소 이사<br><제주한국병원 흉부외과 과장, 의사평론가><br>
송우철
한국보건의료정책연구소 이사
<제주한국병원 흉부외과 과장,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17991212,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말을 타고 농장으로 가서 손님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다음 날, 인후통이 있었지만 종일 농장을 다니며 자를 나무에 표시를 하고 다닐 정도로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그 다음 날인 14일 아침, 목이 심하게 부은 상태로 일어났고, 호흡하기 곤란했다. 조지 워싱턴은 농장 관리인을 불러 사혈(bloodletting)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관리인은 거의 1 파인트(4백 밀리리터)의 피를 빼냈지만 효과가 없었다. 가족들은 급히 의사들을 불러 4명의 의사가 호출을 받았고 이중 3명이 먼저 도착했다. 의사들은 사혈을 계속해 5파인트(2리터)의 피를 더 뽑았다. 이미 순환 혈액량의 절반이 빠진 셈이다. 그래도 호전이 없자 한 의사는 상태가 심각하다 보고 기관절개술을 제안했지만 다른 의사들은 기관 절개의 경험이 없어 이를 반대했다. 결국 그날 저녁 조지 워싱턴은 사망했다.

19세기를 불과 보름 앞두고 미국 초대 대통령이 과다 출혈과 후두개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이는 19세기까지 사혈법이 얼마나 널리, 주요 치료법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사례이다. 사혈법은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고대 그리스, 중세를 거쳐 19세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던 치료법의 하나였다. 유럽의 암흑시대에는 이슬람의 과학과 문화가 융성했는데, 이슬람 의사들도 사혈법의 효과를 주장하며 선호했다. 동양에서 이뤄지는 부항(Cupping)은 사혈 치료의 일종이며, 체했을 때 손가락을 따는 관습도 같은 맥락이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시행된 사혈치료의 이론적 근거는 고대 그리스 학자인 히포크라테스의 체액론이라 할 수 있다. , 인체에는 4가지 형태의 체액이 있는데 이 체액의 균형이 깨지면 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의학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내경에서 주장하는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 음양오행설에서는 인체의 체질에는 목,,,,수의 오행이 있는데, 이 오행은 오장육부와 연결되어 있어, 오행의 불화가 생기면 질병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한의학은 여기에 조선 후기 이제마(1837~1900)가 창시한 사상체질 의학을 더한다. 사상체질에 따르면, 사람의 체질은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의 구별이 있어 외모와 성격이 다르며 생리, 병리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치료방법과 약물의 선택은 물론 생활과 음식물 섭취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대한한의학회지에는 초음파 검사로 자궁근종을 진단받은 환자를 후향적 검사할 때, 사상체질 분포 상 소양인이 더 유의하게 많았다는 식의 논문이 실려 있다. 그럼 소양인 여성이 자궁근종이 더 잘 생긴다는 의미일까는 의문이다.

아무튼, 해부학, 세균학 등의 발달과 현대 의학의 도입으로 질병의 원인이나 치료법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사혈법이나 부항 따위의 치료는 의학적으로 효과가 전혀 없음이 과학적 방법으로 밝혀졌고 곧 폐기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전통의학, 민간요법 혹은 한의학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다. 물론 사혈법이나 부항의 의학적 효능과 무관하게, 내가 혹은 내 가족이 체했다고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검은 피가 나왔다고 좋아하며 체기가 내려갔다고 만족해하는 걸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걸 제도권 내에서 의료 행위로 둔갑시켜 비특정 다수에서 시술하고 이익을 취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의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질병은 정복되지 못했으며, 인체에 대한 이해도 완벽하지 못하다. 그러니 지금의 의료행위가 먼 훗날, 과거의 사혈법처럼 잘못된 행위로 폐기되거나 탄핵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때문에 현대의학을 전공하는 모든 임상의들은 현재 의학 수준에서 객관적으로 검증되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진단법과 치료법을 사용하며 보수적으로 진료하고, 아무리 뛰어난 신의료기술이라 할지라도 성급하게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유효성만큼이나 안전성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의학에서 나만의 비방따위는 없다. 새로운 치료법을 고안했다고 해도, 철저한 규정에 따라 그 효과를 입증하고 안전성을 확보해야 하며, 그것이 비특정 다수에서 적용될 수 있다고 판명되면 학회 보고, 교과서 등재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최대한 널리 알려 치료법을 공유한다.

따라서 새로운 의학적 발견은 신약이나 의료기기처럼 특허로 사용을 제한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한의계는 다르다. 한의사들은 저마다의 비방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공개하는 것을 꺼린다. 비방은 한의원 수 만큼이나 많다고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지난 2017년 복지부는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개발단을 만들어 한방의료기관이 가지고 있는 한의약기술(이른바 비방)을 제도권으로 흡수하기 위해 의료기술은 최대 9억원, 한약은 최대 12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물론 성과는 별로다.

우리나라 의료법에는 마치 퇴화된 흔적기관과 같은 법조항이 있다. , 접골사, 침사, 구사와 안마사에 대한 조항이다. 접골사, 침사, 구사라는 자격은 법적으로 의료유사업자로 불리며 1973년 기득권은 인정하되, 더 이상의 자격 취득을 금지하며 국가 시험을 없앴다. , 침구사나 접골사 등은 더 이상 배출되지 않는 소멸 중인 직업군이다. 침구사 제도는 일제시대에 들어왔다. 일본의 침술은 에도 시대에 독자적으로 발전하며 주로 시각장애인들이 시술하게 된다. 침구 뿐 아니라 안마나 지압도 그랬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서양 의학이 일본 의학의 주류가 되고, 1874년 국가가 의사 면허를 주기 시작하면서 한의사 자격을 엄격하게 규제해 일본 한의학은 빠르게 도태된 반면, 시각장애인이 중심이 된 침구, 안마 등은 장애인들의 생계 수단이므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침술에 대한 체계화도 이뤄지게 된다.

조선 시대에는 의관이 되거나, 도제식으로 배워 의원이 되면 누구나 의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9세기 당시 조선에는 부산의 제생의원(1877), 원산의 생생의원(1883)과 인천, 서울 등지에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외국인을 위한 근대식 의료기관이 있었다. 또 고종의 명에 따라 1885년 설립된 서양식 왕립병원인 제중원(광혜원)이 있었는데, 선교사 겸 의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과 미국 출신의 다른 의사들이 제중원을 운영했다. 제중원은 키니네를 사용한 말라리아 치료 등 서양 의술을 펼쳤고, 제중원 의학교를 열어 서양의학 교육을 시작했다. 제중원의 운영권은 1894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에게 넘어가 왕립의료기관에서 사립 선교의료기관으로 바뀐다. 제중원의 환자가 계속 늘어나자 언더우드는 미국 클리브랜드의 부호 세브란스로부터 기부를 받아 병원을 확장했고, 병원의 이름을 기부자의 이름인 세브란스로 바꾸었으며, 교육기관도 제중원 의학교에서 세브란스 의학교로 바꾸게 된다.

한편, 1900년에 이르러 대한제국은 의사 규칙을 제정해 정부가 자격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에게 의사(醫士) 인허장을 내 주었다. 알렌 등 미국 의사들도 이 면허를 받아 진료를 할 수 있었다. 또 대한제국은 국립병원인 광제원이란 내부병원을 설립한다. 광제원은 주로 종두업무를 취급했다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대한의원으로 명칭이 바뀌고, 일본 출신 서양의사로 채워져 이들이 진료를 했다. 대한의원은 훗날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이 되었다가 서울대학교병원이 된다.

일본 제국이 조선 식민지 통치를 시작하면서 대한제국의 의사(醫士)규칙을 폐기하고, 1914년 새로운 의사(醫師)규칙과 의생(醫生)규칙을 시행한다. 여기서 의사는 서양의학을 공부한 자들이며, 의생은 전통의학 즉, 한의학을 공부한 자들을 말한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미 한의학이 도태되다시피 하여 일본 본국에는 의생규칙이 없었으므로, 대만에서 시행한 의생규칙을 차용했다. , 일본의 침구사 제도를 도입해 일본 침구사들이 침이나 뜸을 원하는 사람들 상대로 영업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은 전통 한의사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대신 새로운 한의사에 대한 자격을 부여하지 않으며 일본의 한의학은 자연 소멸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의 한의학 역시 퇴보를 거듭했다가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고,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한의사(漢醫師) 명칭이 다시 사용되게 되었다. 이는 기존의 전통의학으로 의사 역할을 한 이들의 기득권을 보장하고,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료 인력을 보강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전통은 오랜 역사의 산물이며 유산이므로 보호하고 보전할 필요가 있다. 어찌되었든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 속에 있었던 전통의학도 유산으로 보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걸 박물관에 보전하는 것과 21세기에도 실용 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의학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다. 음양오행이나 사상체질, 비방이 과학의 범주에 있으려면 객관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며, 보편 타당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근현대화 이후 압축 성장을 하며 인구가 빠른 속도로 늘고 소득 수준이 늘면서 의료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고, 게다가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 시대를 맞아 의료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의료인력이 이를 따르지 못하자 한의사 뿐 아니라, 약사도 의사처럼 진단을 붙이고 임의대로 약을 처방 조제해 판 시대가 있었다. 이런 임의조제를 막기 위한 것이 의약분업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사건, 얼마 전 있었던 고속도로 방음터널 화재 사고 등의 공통점은 정확한 안전 기준을 무시하고 요행을 바라며 대충대충 넘기려다 벌어진 인재라는 것이다.

()의학이든 한()의학이든 그것의 효과나 치료 능력이 현대의학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그것에 현대의학으로는 해결 못할 비법이 있다고 믿는 건 망상일 뿐이다. 그러나 차별화된 무엇이 있다 믿는 수요가 있다면 그 수요에 대한 국민적 선택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건강보험 혹은 의료라는 제도권 내에서 보장되어져야 하는 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이에 대한 입증은 물론 한의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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