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현장 떠난 김남영 간호사
[의학신문·일간보사] 저는 의료현장을 떠난 간호사입니다. 오랜 시간 병의원에서 의사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이 환자를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하루를 버티는지 가까이에서 보아왔습니다.
의사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를 만납니다. 그 가운데는 응급 환자, 수술이 필요한 환자,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순간마다 최선을 다합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식사할 시간도 없이 하루를 보내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의료현실은, 이처럼 환자를 살리려는 노력보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지는 구조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환자가 사망하거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하고 과정이 정당했더라도 의사는 형사고소, 언론 보도, 민원 제기에 시달립니다.
의사 10명 중 9명이 고소 경험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제 많은 의사들이 ‘최선을 다한 치료’보다 ‘고소당하지 않는 치료’를 택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이런 현실을 옆에서 지켜봤던 간호사로서, 저는 그 두려움이 얼마나 깊고 실질적인지 압니다. 그리고 그 피해가 결국 환자에게 돌아온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환자의 신뢰 위에 세워진 의료, 지금은 그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의료는 그동안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발전해 왔습니다. 건강보험 제도 덕분에 언제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수술비 부담도 크지 않습니다. 외국에서 감기 진료 한 번에 수십만 원이 드는 현실을 보면, 대한민국 의료의 수준과 접근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료의 뿌리는 결국 의사와 의료진의 헌신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밤새 응급실을 지키고, 학회에 참여하며 지식을 쌓고, 환자 곁에서 끝까지 버티는 수많은 의료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의료인들이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특히 의사를 향한 사회의 시선이 싸늘해졌습니다. 언론은 일부 비윤리적인 사례를 부각시키며, 마치 의료인 전체가 이익만 추구하는 집단인 것처럼 보도합니다.
물론, 모든 집단에는 잘못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99%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의료인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하루를 바치며, 가족의 시간을 포기한 채 환자 곁을 지킵니다.
그럼에도 지금 사회는 의사를 ‘잠재적 가해자’로, 의료행위를 ‘범죄의 가능성’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필수의료라고 불리는 산부인과, 외과, 소아과, 응급의학과의 지원자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누구도 “환자를 살리려다 죄인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서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의사를 보호하는 것은 곧 환자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의료는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나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그건 의사의 ‘의도’가 아니라 ‘한계’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결과만을 보고 의사를 처벌합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의사들은 점점 방어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괜히 수술했다가 사망하면 어떻게 하지?”, “응급환자이지만 혹시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의사는 치료 대신 회피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 피해는 환자에게 돌아옵니다. 치료받을 기회가 줄고, 수술할 의사가 없어지고, 언젠가 우리 모두가 아플 때 “수술해 줄 의사”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처벌이 아니라 신뢰의 회복입니다. 의사들이 고의나 중대한 과실로 환자를 해쳤다면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료사고는 누구도 원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형사 처벌이 아니라, 공정한 조사와 합리적인 보상 체계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국회와 정부가 추진 중인 의료사고처리 특례법은 꼭 필요합니다. 의사의 과실이 명백하지 않은 경우에는 형사 처벌을 제한하고, 대신 의료배상보험이나 공제조합을 통해 피해자에게 충분히 보상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의사도, 환자도 함께 보호받는 길입니다.
저는 비록 지금은 현장을 떠난 유휴 간호사이지만, 여전히 의료가 무너지는 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있습니다. 의사에 대한 불신은 결국 의료 붕괴로 이어집니다. 의사들이 더 이상 환자를 두려움 없이 치료할 수 없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옵니다.
의사를 보호하는 것은 의사를 위한 일이 아니라, 환자를 살리고, 나라의 의료를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는 ‘결과의 처벌’이 아니라 ‘과정의 신뢰’를 회복하길 바랍니다. 의사를 믿는 사회에서만, 환자도 진정으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