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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서 첫 현대의료를 시작한 광주기독병원

미신적 치료 → 과학적 질병치료로 전환

1905년 美 놀란 선교사 광주에 국내서 네번째 현대식 병원 설립
나눔·희생의 밀알정신 이어와

▲ 1905년 제중원, 광주기독병원 뿌리
▲ 놀란 선교사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설립된 현대식 병원으로, 광주지역사회를 미신적(주술) 질병치료에서 과학적 질병치료로 전환케 한 광주기독병원은 1905년 11월 20일 태동했다.

이날 미국남장로교 의료선교사 놀란(Dr. J. W. Nolan)은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광주 선교부 사택으로 사용하던 조그만 기와집(현재 사직도서관 옆)에 진료소(광주제중원)를 개설하고 지역 현대의료를 시작했다.

당시 진료소가 개설된 양림리지역은 성안과는 달리 해발 108m의 양림산으로 전통적으로 조정에 화살을 납품하는 시누대의 자생지였으며, 여우들이 들끓는 버림받은 땅이었다.

놀란 선교사는 진료 첫 날 “놀랍게도 주민들이 서양 의술을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며 “환자 9명과 20여명의 구경꾼들이 모였습니다”고 광주기독병원선교회에서 발간한 ‘제중원편지’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진료소를 개설한지 6개월 동안 오후 진찰실에서 2416명을 진료하였고, 26건의 대수술과 수많은 소수술이 시행되었다는 것을 편지에 적었다.

한번은 환자가 “악귀를 내쫓아 준다고 불에 달군 침으로 무릎에 구멍을 뚫어 너무나 아프다”는 말에 이 악귀는 류마티스로서 살리시레이트 몇 회분으로 그 악귀를 몰아낼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당시 외국인 의사가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는 “의사가 처방하는 약이 병을 일으키는 많은 악귀들을 없애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밝히고 있다.

▲ 1908년 광주제중원 현관앞에서 기념촬영

광주시민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던 놀란 선교사는 1907년 4월 광산회사로 떠나는데, 사역기간이 짧았음에도 적당한 시설을 갖춘 진료소 건물을 신축할 수 있도록 터를 닦아두고 의약품을 준비하는 등 상당한 업적을 이뤘다.

놀란 선교사의 이러한 준비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이름으로 살아간 우월순(Dr. R. M. Wilson) 선교사가 오랫동안 역동적으로 사역을 맡아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우월순 선교사는 미국 워싱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08년 2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의료선교사로서 광주기독병원 2대 원장으로 의료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솜씨 좋은 외과의사로서 1911년에 이 지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제중병원(Ellen Lavine Graham Hospital, 현재의 광주기독병원)을 건축하였으며, 현대적 의술을 시행한 광주지역 서양의학의 선구자며 나환자의 삶과 기쁨이었다.

우월순 선교사는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버림받고 무리지어 거리를 배회하는 수많은 한센병 환우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광주시 봉선동에 한센환자 집단 거주지인 광주나병원을 건축하고 한센병은 완치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환우들을 치료했다.

▲ 1911년 그라함병원(제중병원)

우월순 선교사는 정부의 한센환자 이주정책에 따라 1926년 여수시 율촌면(현재의 애양원)에 새로운 집단 거주시를 조성하고 이주하여 한센병 환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가장 큰 행복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우월순 선교사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부나 지위라고 생각하지만, 성경공부를 하는 나환자들이 가장 험악한 질병에 사람들로부터 악담을 들어도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며 비밀은 ‘성경공부다’라고 적고 있다.

우월순 선교사의 나환자들을 위한 32년간의 사역이 끼친 영향력은 정부주도의 집단거주지를 세우게 하는 등 헤아릴 수 없지만, 무엇보다 그의 정신은 호남인들에게 나눔과 희생의 밀알정신으로 남아 있다.

1927년 우월순 선교사가 나환자들과 함께 여수 애양원으로 집단이주한 후 1930년부터 3대 원장인 부란도(L.C.Brand) 선교사는 결핵퇴치 사업으로 밀알정신을 이어가게 되었으며, 과로로 인해 쓰러져 순교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1933년 화재로 병원건물이 전소되었으나 부란도 선교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광주시민과 교회, 병원은 제중병원을 재건축하는 일을 위해 연합하여 힘을 모으는 큰 역사를 이루었다.

4대 원장인 프레스톤 선교사는 1940년 10월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병원이 강제 폐쇄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51년 병원을 재개원한 5대 원장 고허번(H.A.Codington) 선교사는 결핵퇴치사업을 계승하여 헌신적인 사랑과 열정으로 결핵환자들을 돌보며 나누는 삶을 실천하여 광주시민들로부터 ‘광주의 성자’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결핵환자들을 돌봄에 있어서도 병원에서의 치료뿐 아니라 광주전남 지역 여러 곳에 요양원 설립을 주도하고 지원하여, 어려운 환자들의 퇴원 이후의 삶까지도 배려하였다.

폐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1964년 흉부외과 전문의 심부선(제6대 원장) 선교사의 부임으로 인해 광주의 결핵환자들에게 더욱 빠르고 효과적인 진료가 이루어졌다.

제7대 이철원 원장은 기독교인 간호사 양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수피아간호학교(현, 기독간호대학)를 설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방사선사, 임상병리사, 치과 기공사 수련 제도를 도입하여 지역의 보건의료인 양성에도 기여하였다.

1965년 광주제중병원은 의사수련병원으로 인가를 받아 기독교 의료인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고, 1970년 11월 11일 재단을 분리해 ‘재단법인 광주기독병원’으로 명칭을 바꾼다.

1976년 허진득 박사가 병원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으로서 원장직을 수행하게 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1993년도에 허가병상 600병상의 대규모 종합병원이 되었다.

박병란 병원장은 “광주기독병원은 광주지역에 현대의료를 처음 시작하여 111년간 이 지역 근현대사의 발전과 아픔을 함께해 온 역사의 증인”이라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선교중심병원이며 환자중심병원으로서 선한 의료인들이 진료하는 좋은 병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광주기독병원은 역대 병원장 외에도 여계남(치과의사), 유수만(치과의사), 서서평(간호사), 변마지(간호사) 등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사랑으로 나누고 섬기며 희생하는 밀알정신과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차원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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