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예술의 목표는 통찰이다”

‘선비 조각가’ 김종영 ③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초대전을 기념해 발간한 작품집에 김종영은 200자 원고지 23장 분량의「자서(自書)」를 실었다. 먼저 그는 조각가로 활동해 온 30여 년 동안 자신이 무엇을 고민하며, 어떻게 작업해 왔는지를 밝혔다.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일찍이 주로 인체에 제한되어 있는 조각의 모티브에 대해서 많은 회의를 가져왔다. 예술이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감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의 모색과 방황 끝에 추상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내가 갖고 있던 여러 가지 숙제가 다소 풀리는 듯하였다. 사물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참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지역적인 특수성과 세계적인 보편성과의 조화 같은 문제도 어떤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그 동안 약 30년간의 제작생활은 이러한 여러 가지 과제에 대한 탐구와 실험의 연속이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나는 완벽한 작품이나 위업을 모색할 겨를도 없었고 거기에는 별로 흥미도 갖지 않았다.”


한국미술 당면과제 실마리 찾아


전통서화에서 서양미술로 전환되던 20세기 한국미술계에서 가장 절실했던 것은 서화와 미술의 차이점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어떻게 미술을 수용하고 서화와 융합해 종국에는 세계미술과 함께하는 한국미술을 이뤄 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물론 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추상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를 연구해 보니 20세기 한국미술계의 당면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가 1세대 조각가이며 교육자였던 자신의‘시대적 소명’으로 자각하고 몰두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자신의 작품관을 설명했다.


“나는 복잡하고 정교한 기법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숙달된 특유의 기법이 나의 예술 활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표현과 기법은 단순하기를 바란다. … 나는 작품의 유기적인 구조와 더욱 효과적인 입체를 위해서 대칭(Symmetry)을 깨뜨리기에 힘쓴다. … 생명의 동적인 상태는 항상 비대칭(Asymmetry)이다.”


이런 관점에서 제작된 조각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요즘 말로 하면 ‘작가의 진정성’ 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작품은 美의 근접법 이해하는 것


“예술가는 누구나가 관중을 염두에 두게 되며 예술가가 생각하는 관중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많고 넓을수록 좋다. 그러나 진정한 관중은 자기 자신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기만하면 관중을 속이는 셈이 될 것이고,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면 그만큼 관중에게 성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은 자신을 위해서 제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고 나서 김종영은 ‘창작이란 무엇인가’ , ‘예술과 시대의 관계’ 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였다. 이것은 동·서 미술에서 방법론의 차이는 있지만 오랜 시간 논의되었고 지속되는 보편적인 화두다. 왜냐하면 어느 지역의 예술이든 ‘법고창신(法古創新)’ 을 지향하며, 예술가 또한 ‘지금·여기’ 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예술가가 미를 창작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창작을 위해서 작업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나에게 창작의 능력이 있다고는 더욱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개성이나 독창성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갖기보다 자연이나 사물의 질서에 대한 관찰과 이해에 더욱 관심을 가져왔다. 자연현상에서 구조의 원리와 공간의 변화를 경험하고 조형의 방법을 탐구하였다. … 작품이란 미를 창작한 것이라기보다 미에 근접할 수 있는 조건과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개성이나 창의에 대한 개념이 너무도 단순하여 한 작가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종합적인 역량이나 예술성을 면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 예술에서는 자연이나 인간의 현실이 옛날과 같이 단순하게 반영되지 않는 데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예술의 단절현상이라 하겠다. … 그러나 … 우리가 역사나 현실이나 모든 자연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고 완전히 단절이 된다면 우리의 생활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에게 가능한 것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사실상 작품을 형성하는 모든 요소가 다른 사람의 작품과 조금도 관련됨이 없이 완전하게 자기창안에 의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겠다. … 예술이라는 것이 사회나 시대에서 유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항상 남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한 자기의 이념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해가는 것이라 하겠다. …”


예술에서 상호영향은 당연한 것


상호영향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미술계는 지난 세기의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서구동시대 미술을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에 반해 김종영은 상호영향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였다. 그는 또한 20세기 한국미술계가 당면했던 과제, 즉 ‘전통을 지킨다는 것’ 에 대해서도 성찰하였다. 바로 이 전통에 관한 성찰이 그의 남다른 사유가 특히 돋보이는 부분이다.


“전통이라는 것도 자기의 외부가 아닌 내부의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이며 … 전통이란 단순한 전승이나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탄생과 인격의 형성을 뜻하는 것이다.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을 어떻게 생활하느냐는 문제와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면 역사적 자각, 다시 말해서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생활하는 노력과 더불어 부단한 반성과 비판의 지속이 없이는 진정한 전통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통이란 말 속에는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예술창작도 하나의 초월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 이 초월이라는 것에 대해 잘못 인식하면 부정이나 관념으로 그치기 쉽다. 초월이라고 해서 피초월체를 기피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통하여 비로소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월은 어디까지나 성실과 사랑의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관념과 허구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초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의 세계에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초월이 있는데 형체나 색채에서부터 기법상의 여러 가지 규범을 초월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시대를 초월하고 예술 그 자체를 초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식민지 상황에서 형성된 한국미술계였기에 동시대의 여러 작가들이 전통의 문제를 감상적인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소재나 형식에서 그 해결점을 찾으려 했던 것에 반해, 그가 전통에서 초월성을 유추해 가는 과정은 매우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초월하는 것이 현실과 역사적 자각에 기반한 부단한 반성과 비판 속에서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전통과 초월에 대한 성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인생, 예술, 사랑 △「무한한 가치」 이것은 인간의 자각이다. △인생은 한정된 시간에 무한의 가치를 생활하는 것. △인생에 있어서 모든 가치는 사랑이 그 바탕이다. △예술은 사랑의 가공 △예술은 한정된 시간에 무한의 질서를 설정하는 것 △예술의 목표는 통찰이다.”


도리를 바탕으로 예술을 이뤄야


▲ 根道核藝, 연대미상, 131x33cm
그의 서예작품 중「根道核藝(근도핵예)」라고 쓴 것이 있다. ‘도를 근본으로 삼아 예를 이룬다’ 는 뜻으로, 그의 예술관이 잘 드러난 서예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根道核藝」와 위 결론을 종합해보면 ‘도리를 바탕으로 예술을 이뤄야하기에 통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내용으로 인해「自書」는 20세기 한국미술계가 안고 있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 방향을 명료하게 정리, 제시한 명문(明文)인 것이다.


이 글을 그는 정년퇴임하며 자신의 작품집 맨 뒤에 자신이 정리한 연보, 그리고 30여 년 간 제작한 조각 작품 전체 목록과 함께 실었다. 그는 진정한 선비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몸소 실천한 삶을 산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집의 발간은 은퇴한 선비의 문집 발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글·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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