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은 조각가이자 문인화가였다

‘선비 조각가’ 김종영 ①

『 방고화』, 종이에 먹과 수채, 37X51cm, 1973
지금까지 발표된 김종영에 관한 모든 글은 항상 그가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가학(家學)으로 전통 한학(漢學)을 익히고 휘문고보에 입학하여 은사 장발을 만나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라고 시작한다. 이번 의학신문에 연재한 이 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김종영의 제자들은 모두 그를 “선비와 같은 고매한 인품을 지닌 스승” 이었다고 회상한다. 이로 인해 김종영 하면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 와 더불어 ‘선비’ 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김종영에 대한 연구에서 ‘전통 한학’ 과 ‘추상조각’ 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는 부재하였다. 그의 추상작업과 전통 한학과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부재한 근본적인 이유는 기존의 미술사학계가 서양미술과 동양미술을 함께 아우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종영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양과 서양의 미술, 즉 바꿔 말하면 ‘서화(書畫)’ 와 ‘미술’ 모두를 살펴봐야한다. 사실 ‘미술’ 이라는 말이 19세기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생동안 서예 정진 많은 작품 남겨

주목해야 할 점은 김종영이 동년배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꽤 많은 글을 남겼다는 것과 일생 동안 서예에 정진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김종영미술관이 수장하고 있는 약 1000여점의 서예 작품의 원문출전은 노자·장자를 비롯해 매우 다양하다. 특히 같은 글을 다양한 서체로 쓴 작품들이 여럿 있다. 더불어 현재 김종영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3000여점의 드로잉 작품 중에는 ‘옛 그림을 따라 그렸다’ 는 의미의 『방고화(倣古畵)』 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으며 추사(秋史)의『세한도(歲寒圖)』와 똑같은 제목의 풍경화도 있다. 그리고 그는 한시(漢詩)를 곁들인 수묵화도 여러 점 남겼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그는 서양조각을 하는‘조각가’이면서 조선시대 ‘문인화가(文人畵家)’ 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종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문인화’를 그리던 조선시대의‘선비’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세한도, 1973
조선은 주자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건국하였다. 그런 조선 왕조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학예일치(學藝一致)를 이룬 자’로 설정하였다. 달리 말해 문·사·철을 기본으로 한 학문과 시·서·화 예술을 겸비하여 학식과 인품을 갖춘 자를 지향하였는데 그가 바로 선비다.


먼저 선비의 일생을 살펴보자. 선비의 일생은 일반적으로 집안에서 교육을 받다가 열 살이 되면 집을 나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사십이 되면 벼슬길에 나아가고, 칠십이 되면 벼슬길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특히 선비는 은퇴할 때가 되면 자신의 지적활동을 점검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따라서 선비의 지적 활동은 문집의 발간을 통해 완결되었다.


선비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이었다. 이를 위해 선비는 반드시 여흥을 배제한 절제된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선비에게는 ‘일상이 수행’ 이므로 일상에 대한 성실하고 진지한 접근 자세가 중요했다. 선비의 삶에서‘일상이 수행’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글로 윤최식(尹最植)이 쓴 『일용지결(日用指訣)』(1880)을 들 수 있다. 『일용지결』 은 성인을 지향하는 선비가 따라야 할 일상의 지침을 제시한 것으로, 먼동이 틀 무렵인 인시(새벽 3-5시)에서부터 다음 날이 시작되는 축시(새벽 1-3시)까지 하루를 두 시간 단위로 나누어 각 시각에 해야 할 일과 그 시각에 어울리는 마음가짐을 적어 놨다.『일용지결』을 보면, 선비는 하루 내내 공부와 집안 일로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선비는 뜻을 확고히 세워 나태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엄격하게 단속해 순간순간 흐트러지는 마음을 바로잡으면서 공부에 매진해야만 했다. 주자 성리학에서 말하는 공부 방법론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다 . 주자에 의하면 ‘격물치지’ 라 함은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탐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뭇 사물의 모든 측면과 내 마음의 온전한 원리와 광대한 작용을 전부 깨닫는 ‘활연관통(豁然貫通)’, 즉 사물의 이치에 대해 막혀 있던 것이 꾸러미를 꿰듯 환하게 통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이다. 이런 격물치지는 ‘격물’ 과 ‘치지’ 가 합쳐져 ‘격물’ 을 통해 ‘치지’ 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격물이라 함은 어떤 것의 “본(本)과 말(末)을 헤아리는 것” 이며 치지는 “올바로 아는 것” 이다. 그러므로 격물치지라 함은 ‘어떤 것의 본말을 헤아려 올바로 아는 것’ 이다.


登陟寒山道, 1977
유학과 노·장사상에도 많은 연구

한편 유학(儒學)의 교양을 갖춘 김종영은 ‘불각(不刻)의 미’ 를 추구하고, 자신의 서예 작품에 노자·장자의 글을 많이 썼으며, ‘不刻道人(불각도인)’ 이라는 서명과 인장으로 낙관 한 것을 보면 유학과 대척점에 서있는 노·장 사상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성인의 경지를 설정하고 학습을 통해 그 경지에 다다르고자 하였으며, 개념화를 통해 범주화시키고자 하였다면, 노자는 도덕경 첫 장에서 “도가도비상도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이라 하여 공자와는 반대 입장에서 ‘도, 즉 인간이 가야 될 길’ 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 즉 ‘세상 만물과 자연의 이치가 저절로 그리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그 속에서 존재 한다’ 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고 김종영의 추상조각을 살펴보면 이는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된다. <계속>
[글·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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