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이 설정한 일생일대 과업은?

‘과작의 작가’ 김종영 ②

김종영의 1964년 1월 1일 일기. “지금까지의 제작생활을 실험과정이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종합을 해야할 것이다”라는 글은 그전까지의 작업이 실험의 연속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니 1936년 청운의 꿈을 품고 동경으로 유학 가던 시절부터 치면 약 30년이라는 세월을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자 실험에 매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참으로 긴 시간이지 않은가? 그는 자신만의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과정에서의 실험작들을 발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적은 작품발표 횟수를 가지고 ‘과작의 작가’로 단정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기보다는 관점을 달리해서 그 동안 그가 어떤 생각에서 무엇을 실험하였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김종영이 과작의 작가로 불린 것은 그의 첫 개인전이 1975년 회갑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첫 개인전도 본인이 자발적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인 조소과 동문회가 스승의 전시를 개최해 드린 것이었으니, 이마저도 없었으면 그는 개인전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첫 개인전 5년 후 그러니까 정년퇴임하던 1980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각가로는 최초로 회고전을 하게 되었다. 당시 회고전에 대한 기사에 의하면 “우리 미술계에 공적을 남긴 작가를 초대, 미술사적 정비 작업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 작품전은 이성자, 유영국, 박성환, 김흥수에 이은 다섯 번째 기획전”이었다.


예술가도 농부처럼 수확을 잘 거둬야


이 회고전을 개최하는 심정을 김종영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 예술이란 농부와 같아요. 가을의 수확을 위해 이른 봄부터 거름을 주고 김매는 수고를 아끼지 않듯 예술가도 수확을 잘 거둬야 해요.』


▲ 1973년 1월 삼선교 자택 마당에서 작업 중인 김종영
농부는 가을 수확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농작물을 돌봐야만 한다. 요행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돌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음해에 더 많은 소출을 얻기 위해서는 세심한 관찰을 통해 농작물의 성장 과정을 축적하고 분석하여만 한다. 그래서 그저 자연에 순응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예술을 농부에 비유하여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농업을 뜻하는 영어 ‘agriculture’에서 문화 ‘culture’가 파생된 말이 아니던가?


김종영은 1980년도 회고전을 개최하며 혼신의 노력으로 전시를 준비하였다. 그런 점은 그의 제자이며 현 김종영미술관 관장인 조각가 최종태가 스승에 대한 기억을 엮어 출간한 『한 예술가의 회상- 나의 스승 김종영을 추억하며』 가운데 그 회고전에 대한 부분인 「도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라는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농부의 수확물이기에 최고의 정성을 들여 만든 그 도록에는 일생을 바쳐 제작한 작품 목록이 연도 별로 꼼꼼하게 정리 수록되었다. 따라서 그 도록은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 연구에서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기본 자료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서설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다시 그가 실험하여 정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일본 유학 때 김종영은 일본인들이 수용하여 일본화한 서양조각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당시 서양 작가들의 조각 작품에 심취해 있었다. 동경 유학시절 그는 『생각하는 사람』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에 대한 짧은 글을 썼다. “그(로댕)의 존재는 오랜 동안 압박되어 온 이탈리아 세력에서 프랑스 조각의 해방을 의미하고, 겨우 프랑스는 자신의 감각에 의한 조각을 가진 기쁨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그가 프랑스 조각의 독립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어서 그는 로댕과 현대조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의 자연에 대한 통찰은 오늘날 어떠한 새로운 예술적 활동도 완전히 포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수많은 조각가들이 로댕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적지 않은 신고를 겪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야를 넓혀 현재 조각계의 동향을 관찰할 때 대부분의 소위 새로운 예술 활동이라고 할 만한 것은 결국 그 발원체가 로댕이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로댕을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정(正)이라고 보는 사람도, 부정(不正)이라고 보는 사람도 모두 로댕의 영향 없이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종영, 로댕 아류로 머물지 않았다


또한 김종영은 1957년 11월 11일 『대학신문』 중 서양미술의 명작을 소개하는 「태서(泰西)명작」 이라는 난에서 로댕의 『발자크』 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밀한 관찰과 끊임없는 천착으로 사실의 극치에 도달한 로댕의 예술이 이 기념상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게 된 것은 그것이 현대조각의 출발점이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의 업적에 경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조각의 세계는 물형(物形)의 묘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체를 형성하는 괴는 그 자체의 고유한 감각을 갖는 것이고, 이 괴를 구체적인 자연의 존재로 보여주는 데서 어떤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 조각의 시초이기도 한다. 일생을 바쳐 개척한 새로운 조각의 출발점 그것은 또한 인류가 처음으로 조각을 발견한 그 장소였던 것”이라고 하였다.


동경 유학시절부터 1957년 『대학신문』에 로댕의 작품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까지 거의 20년이라는 시차가 있다. 그럼에도 조각가 로댕에 대한 경의는 크게 변한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김종영은 결코 로댕의 아류로 머물지 않았다. ‘현대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도 자신의 스승 로댕을 떠나며 그 변으로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김종영의 탐구 또한 동시대 조각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불혹이 눈앞인 그가 1953년 5월 4일 『대학신문』과 가진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공모전 수상기념 인터뷰에서 밝힌 것과 같이 그의 목표는 “세계수준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하는 사람에게야 조국이 있는 이상 조국이 이런 처지에 있을수록 분투할 각오와 태세를 더욱 굳게 할 뿐” 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1964년 김종영이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실험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 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무엇’ 은 바로 ‘한국미술에서 일본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세계수준을 돌파해 나아가는 것’ 이다.


일본 그림자 걷어내기 혼신 기울여

조각가 김종영이 자신의 일생일대의 과업으로 설정한 것, 즉 일본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한국조형예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그는 농부의 자세로 작업에 임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가 동경 유학시절 자신의 평생지기였던 박갑성에게 “예술도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고 말하였던 것을 상기해보면 김종영은 일생을 ‘수도자’ 와 ‘농부’ 의 자세로 삶을 영위하고 작업에 임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박갑성은 그런 그를 ‘임산부처럼 몸을 조심하며, 정신을 가다듬으며 일평생을 임산부처럼 살았다’ 고 회고하였다.


그렇다고 그는 현실을 외면하며 살지 않았다. 동경 유학시절 어느 날, 그는 박갑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에는 진·선·미만을 추구했지만 이제는 한 가지가 더 있어야 하네. 진·선·미가 삼각추처럼 높이 솟으려면 현실적인 기초, 든든한 밑바닥이 필요하다는 말일세.”

박갑성의 전공이 철학임을 감안하면 김종영은 작심하고 이 말을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김종영은 현실을 직시하며 그 기반 위에서 진·선·미를 찾고자 한 것이다. 현실이 결여된 사유는 신기루와 같을 수밖에 없다. 이미 그의 실험의 목적이 설정되었고, 이제 목적에 따른 실험의 구체적인 방법이 결정된 것이다.


이제 그가 어떤 방법을 통해 자신이 설정한 실험의 목적, 즉 일본미술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세계수준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며, 작업을 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 통해 왜 그가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지 그 참된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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