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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은 정말 ‘과작의 작가’ 였을까?


김종영은 정말 ‘과작의 작가’ 였을까?

‘과작의 작가’ 김종영 ①

1975년 환갑을 맞아 그린 자화상 배경에 김종영은 “그림 그리느라고 늙어가는 것도 모르나니 내게 부귀영화는 뜬구름 같다” 는 내용의 한시를 썼다. 그 해 11월 11일부터 16일까지 신세계 미술관에서 조소과 동문회 주최로 회갑기념 김종영 작품 초대전을 개최하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서 후학들이 스승의 회갑을 맞아 기념전을 개최한 것은 김종영 회갑전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던 고 이경성이 이 전시 도록에 “양괴(量塊)에서 생명을 찾는 미의 수도자” 라는 제목의 서문을 썼다. 거기서 그는 김종영을 ‘과작의 작가’ 라 하였다. ‘과작(寡作)’ 이라 하면 말 그대로 “작품 수가 적다” 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종영이 ‘늙어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작업에 매진하였다’ 고 자신의 소회를 밝힌 것과는 모순되는 듯한 표현이다.


그런데 사실 조금 놀라운 것이 이 회갑전이 김종영의 첫 번째 개인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경성은 김종영을 충분히 ‘과작의 작가’ 라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 삼선교 자택에서 김종영 (1981)
1975년 회갑전 도록에 실린 전시 이력은 간결하다. 거기에는 1953년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 조각공모전으로 시작해서 국전 7회, 국제전 2회, 단체 및 초대전 2회 그리고 1959년 월전 장우성과의 전시가 전부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김종영이 작성한 이 전시 이력에는 제1, 2회 국전 출품이 빠졌다. 특히 1953년 제2회 국전은 그가 한국 추상조각의 효시인 <새>를 출품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전시였다. 여하튼 이렇게 두 번의 전시를 추가하더라도 작품 발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총 10여회 작품발표‘과작(?)’


김종영은 ‘지천명(知天命)’, 즉 ‘하늘의 뜻을 안다’ 는 나이 오십이 되던 해, 1964년 1월 1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을묘생(乙卯生)은 오십이라는 나이를 탄식한다. 생각하면 오십은 노인으로 행세하는 나이다. 어언간 오십이 되었고 덧없이 오십이 된 셈이다. 지금까지의 제작생활을 실험과정이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종합을 해야 할 것이다. 조형의 본질, 형체의 의미 등에 관한 그 동안의 실험을 종합할 수 있다면 오십이란 연령은 결코 헛된 세월은 아닐 것이고 목표에 한걸음 가까워지는 셈이 될 것이다. 늙어지는 것이 한편으로 얻어지고 목적에 도달하는 도정으로 되어야할 것이다.”


이 일기를 쓰던 때 김종영은 삼선교 한성대학교 못 미쳐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집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휴전 후 피란지 부산에서 올라 와 살던 동숭동 대학관사에서 줄곧 지냈다. 그 이유는 6·25 동란 직전에 친구를 보증 선 것이 잘못되어 돈암동 집이 압류 처분되었기 때문이다. 그 삼선교 집으로 가게 된 사연을 부인 이효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 … 우리가 왜 이 대벽(꼭대기)에 올라 왔느냐 … 그분이 조각을 하셨잖습니까? 그때만 해도 여기 집도 없었습니다. 그대로 달동넨데 여기 까만 지와 지붕만 몇 채 있는데, 요 모퉁이에 양옥집 반듯한 게 하나 있어요. 당신이 와 보시더만 「내가 돌로 쫗고 소리가 나도 아무도니 왜 허노 안 하겄다. 요기 정착을 해야겄다.」 … 보통사람보다 달라요. 김종영씨가. 그 부잣집 손자로, 그때 사또 할아버지 계실 때도 당신이 업어 컸답니다. 그래 장한 사람이 우째 이 달동네 와서 이래 살 수 있을까요? 그거 없어요, 그 양반은 오로지 내 작품하는데 조용하고 한갓진 데 좋다고, 그렇다고 작업실도 없었어요. 방도 작업실, 마리도 작업실, 마당도 작업실 닥치는 대로 그래 허시데요. … 전시회도 요새 사람처럼 그래 안 하시고 늦게야 했습니다. 회갑전 그때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 전에 한 번 2인전을 하시고, 월전선생님하고. 그래 또 잊아 불고 있다가 정년퇴임 때 하셨죠. 요새는 자꾸 해가 발표해야 되는데 「발표 그런 것 필요 없다」 카고 「내 열심히 하는 거지 뭐 누구한테 발표하고」 뭐 이게 없는 것 같애요. 교수님들이,「그르니 사람들이 잘 모른다」 고. …”


“환경 탓함은 모자라는 예술가”


김종영이 삼선교 집을 선택한 이유는 오로지 작업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차남 김익태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 60년대 중반에는 미술가들도 경제적 여건이 개선되어 주위에 아틀리에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님은 어떻게 남들처럼 돈도 좀 벌어 아틀리에 하나 마련해 보자고 아버님께 권하셨다. 그러나 아버님은 무언으로 답하시고서 추운 겨울에도 마당에 나가 눈 위에서 손을 녹이며 작품을 제작해 어머님을 안타깝게 하신 적도 있다. 아버님은 항상「환경을 탓하고 소재를 탓하는 예술가는 모자라는 예술가다. 나는 어떤 여건에서도 어떤 소재를 가지고도 내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


김종영은 삼선교로 이사하면서부터 실험과정을 마치고 실험의 결과를 종합하여 환경과 여건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학교와 집을 왕래하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일구어 나갔다. 그런 그가 ‘과작의 작가’ 였을까? <계속>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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