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이 애국선열조상 건립을 고사한 이유?

김종영의 기념조각 ④-“나는 사실적인 것을 못하네”

김종영이 삼일독립선언탑을 제작하고 3년이 지난 1966년 8월 15일 광복절에 서울신문사에 “우리민족사상 불멸의 공적을 남긴 위인 및 열사들의 조상을 건립함으로써 그 정신을 길이 선양케 하여 민족의 귀감으로 삼고자”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당시 총재는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었다. 그리고 5개 분과위원회를 두었는데 조각상 제작의 실질적인 업무를 맡아보는 전문위원은 위원장에 김경승, 위원으로는 김종영, 김세중, 송영수, 김정숙으로 모두 조각가였다. 기획분과는 주로 학자들로 구성되었고, 재정분과는 실업인들로 이루어졌다. 건립분과위원은 위원장에 서양화가 김인승, 위원으로는 건축가 김수근, 서울시 제2부시장 차일석, 서울대 교수 임영방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인물이 고 임영방(1929-2015)이다. 임영방은 1964년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고, 1965년 귀국하여 후학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임영방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애국선열조상을 제작할 작가 추천을 도맡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새마을운동의 민족기록화사업을 기획하고 작가 선정에도 참여하였고, 평론가로 활동하며 한국미술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관장(1992-1997)을 역임하며 학예사 중심의 미술관으로 체제를 갖춰 나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시행된 애국선열조상건립과 민족기록화 사업으로 인해 미술계가 어떻게 변하였는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 그거가지고 이제 떼부자가 됐지, 한번에. 한 건으로. 그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버스타고 댕기고, 막걸리도 못 먹던 친구들이 이제 위스키 마시게 되는거야. 그때부터 이제 돈이 쏟아지는 거야. 미술계 전체에 돈이 쏟아져. 펑펑 돈이 쏟아져. 내가 지금 그 액수를 얘기 안해서 그렇지. 내 눈앞에서 이렇게 거기 사람이 와서 이렇게 자기앞수표로. 그 당시에 … 내가 살던 우리 집 몇 채 값이 나가는 거야. …”

이 증언에 의하면 애국선열조상을 제작하거나 기록화를 그린다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1968년 첫 번째로 광화문에 건립된 이순신 동상부터 1972년 열다섯 번째로 대전체육관 앞에 건립된 윤봉길 동상까지 총 15개의 동상 중 김경승 세 점, 김세중 두 점, 송영수 두 점, 김정숙 한 점으로 전문위원이 여덟 점을 제작하였다. 그에 반해 김종영은 단 한 점도 제작하지 않았다.


여러 분들의 기억에 의하면 1960년대 서울대 교수 월급이라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김종영의 부인 이효영 여사의 회고를 통해 당시 사정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 … 서울에 사변 후에 살면서 돈이 참 없어요. 그래서 내가 돈타령 하면 「보소, 내 이손으로 돈을 벌라면 감당을 몬 한다. 사람이 그래서 쓰나? 그 돈 뭐할 긴데? 이렇게 살면 되는 거지 뭐.」 그때도 미술 하는 사람은 다 생활이 넉넉해요, 우리보다는. 다 먼 과외도 하고 … 일절 그런 게 없었어요. 자기 서울대학에 가서 하는 그것뿐이죠. 집에 와서 개인지도 해달라고 얼마나 옵니까? 어림도 없어요. 한 건도 안 했어요. 그러니 내가 아아는 많지, 오죽 했겠어요? …”

그리고 2012년 이효영 여사는 모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선생님은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없다” 고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의 수상록인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에 「생활과 예술」 이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대략 1964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노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불안, 공포, 초조 … 이와 같은 현실적 역경이 예술가의 제작생활을 저해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작에 수반되는 의지력이나 초월적 감정과 같은 정신적 충동은 매양 불안한 생활의 번뇌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작의 직접동기가 또한 생활의 고뇌에서 오는 수가 허다하다. 예술가들은 생활의 역경을 창작활동으로서 轉化시켜야한다. 극복하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생애는 이것을 웅변하고 있다.” (자필원고 그대로를 게재한 것임)

▲ 1966 채근담 후편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그는 이 글 뒤에 『채근담』 후집에 나오는 글을 적었다.

得趣不在多(득취부재다)

정취는 많은 것에서 얻는 것이 아니니

盆池券石間(분지권석간)

좁은 연못과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煙霞具足(연하구족)

연기와 안개가 깃든다.

會景不在遠(회경부재원)

좋은 경치는 먼 곳에 있지 않으니

蓬窓竹屋下(봉창죽옥하)

오막살이 초가집에도

風月自賖(풍월자사)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이 스민다.

1966년 그는 이 글을 서예작품으로도 남겼는데, 내용으로 봐서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선비의 마음자세를 느낄 수 있다. 부인의 회고와 이 글을 읽으면서 임영방의 구술을 떠올려 보면 김종영이 추구했던 삶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임영방의 다른 구술에서 김종영의 진면목을 확인 할 수 있다.

▲ 자화상, 35x38cm, 수채, 1975
“근데 김종영선생한테 내가 이걸 프로포즈를 했지, 서울미대! 그랬더니 김종영선생이 자기는 그런 「사실적인 것을 못 한다」 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때 아 이 양반이 그 쪽으로 일본 교육 받은 분인데, 「그 선생님, 이런 기회 없는데, 하나 만들어 놓으시면 좋을 텐데요.」 그러니까, 「나는 안 해!」 그래. 그 때 내가 이제 확인한 것이 사실적인 작품도 그렇지만은, 그런 식의 정부의 박정희대통령 관계에서 이렇게 하는 관아에서 말하는 작품이면은 자기는 안 한다 하는 것이 나한테 딱 오더라고, 그걸 풍기더라고. 그래서 이건 안 되겠구나. 그래서 그런 것을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을 필요가 있어. 김종영선생, 그러면 아, 미술대학의 은인이고, 초창기에서부터 우리를 가르쳤고, 그래도 서울 미대 조소과 관계는 대 선배고 뭐 여러 가지로, 그런 걸 갔다가 따지고 참 존경하지만은 지금과 같은 그런 일이 그 당시가 어느 때야 그런 기회가 없어가지고. … 돈을 얼마만큼 많이 줬는데, 그 당시에.”

김종영은 “사실적인 것을 못 한다” 는 말로 그의 제안을 고사하였다. 그가 고사한 이유는 애국선열조상건립이 포항전몰학도추모비와 삼일독립선언기념탑과 같은 순수한 추모와 기념을 위해 제작되는 것이 아님을 간파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그가 일본화를 예로 들어 관 주도의 특정 목적에 순응하며 작업하는 것이 예술 타락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했던 것을 상기하면 임영방의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한편 그는 1975년 환갑인 해에 그린 자화상에 다음과 같이 썼다.


丹靑不知老將至(단청부지노장지)
그림 그리느라 늙어감도 모르나니
富貴於我如浮雲(부귀어아여부운)
내게 부귀영화는 뜬 구름과 같도다.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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