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 애국충성 기리는 기념탑 제작에 혼신

김종영의 기념조각 ③-탑골공원 <3·1독립선언기념탑>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김종영)
1963년 8월 15일 오후 4시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3·1독립선언탑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제막식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갑성씨와 외국인 협조자였던 스코필드(Francis William Schofield:1889-1970, 한국명 석호필)박사가 참석하였고, 박정희 의장의 치사 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낭독자였던 정재용씨의 만세삼창으로 마쳤다.


3·1독립선언기념탑은 국민들이 모금한 성금과 박정희 의장의 특별기금을 합쳐 총 520만2825원으로 건립되었다.이 기념탑은 탑신 4.2m, 동상 3.7m, 총 8.9m 높이의 탑과 높이 4.2m 폭 17.5m의 병풍석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박정희 의장이 특별기금을 희사하고 제막식에서 직접 치사를 하였던 것, 그리고 참석한 내외귀빈 명단을 살펴보면 국가기념 조형물로서의 3·1독립선언기념탑은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1독립선언기념탑 제작 위촉 배경

김종영이 포항 『전몰학도 충혼탑』 을 제작하게 된 경위를 확인할 길이 없는 것에 반해, 김종영이 어떻게 3·1독립선언기념탑 제작을 위촉받게 되었는지는 1959년 김종영과 2인전을 개최하였던 월전 장우성의 회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5·16군사정변 후 구성된 재건운동본부에서 세 개의 국가기념물(삼일독립선언기념탑, 사일구기념탑, UN기념탑)을 제작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재건운동본부 본부장이 자신과 친분이 있던 서울대 농대 교수 유달영씨여서 자신에게 이 사업에 대한 자문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 … 아무튼 유달영 본부장을 만났을 즈음 어떤 상황이었냐 하면 작고한 김경승씨가 세 가지 기념물에 대한 계획서를 운동본부에 제출을 한 상태였나봐요. 말하자면 혼자 세 개의 기념물 제작을 다 맡으려고 한 거지. 유달영씨는 우리나라에 조각가들이 많을 텐데, 한 사람에게 다 줘도 괜찮은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마침 내가 미술계에 있고 하니까 의논하러 만나자고 한 거예요. 나는 물론 김경승씨도 훌륭한 조각가지만, 이런 중대한 기념물을 만드는 데 한 사람이 다 한다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유달영씨가 그럼 어떤 조각가가 있는지, 그 조각가들에 어떤 작품들을 맡기는 게 좋을지 조언을 해달라고 했어요. 우선 나도 조각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자세하게 아는 바는 없지만, 아는 범위 내에서 김경승씨 이외에 우성 김종영, 김세중 등을 좋은 조각가라고 추천한 겁니다.

유달영씨에게 내 생각을 전했지요. 수유리의 4·19기념탑을 김경승씨한테 맡기는 게 좋겠고, 3·1독립선언기념탑은 김종영씨한테, 마지막으로 UN기념탑은 그때 한참 신인으로 떠오르던 김세중씨가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또한 그렇게 해야 공정할 것이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유달영씨가 알겠다고 했어요.” 장우성의 조언은 그대로 실행되었다.그러므로 3·1독립선언기념탑제작은 김종영에게 참으로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다.

당시 조각가 추천 기준은 ‘공정성’

▲ 3·1독립선언기념탑 제막식순
한편 장우성이 조각가 추천을 하며 가장 먼저 고려한 ‘공정성’ 은 당시 조각계의 사정을 살펴보면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사실 4·19기념탑은 1960년 4·19 직후 4·19의거학생대책위원회 내 4월민주혁명 순국학생위령탑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주관으로 시청 앞 녹지대에 80척 내외의 위령탑을 공모 건립하려했던 것이 시초였다. 1960년 9월 1차 공모 결과 당선작 없이 가작으로 월남한 차근호의 안과 홍익대학교 출신들로 이루어진 김영중, 엄덕문, 최기원의 공동안이 선정되었다. 그 후 일부에서는 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하였고, 주관자는 그들에게 합작으로 단일안을 만들 것을 요청하였으나 차근호가 거부하였다. 그래서 12월 2차 공모를 실시한 결과 새롭게 이일영의 안이 1등으로 당선되었다. 차근호는 2등, 즉 낙선을 하였으며 결과 발표 후 『조선일보』 에 자신의 유서를 보내고 음독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이일영의 안은 추진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건립안은 1961년 발족된 재건운동본부로 1962년 6월 이관되어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세 개의 기념물을 세우는 것으로 확대 추진되었다.

그렇다면 신문보도를 통해 이런 우여곡절을 알고 있었을 김종영은 어떤 마음자세로 이 작업을 임했을까? 김종영이 1915년에 태어났으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어렴풋하게 기억할 수 있는 다섯 살이었다. 그래서인지 친구 박갑성은 김종영이 이 작업을 한 이유를“비록 철모르는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직접 그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하지는 못했고, 같이 고통을 당하지도 못했어도 그도 평생을 두고 나라 없는 백성으로 갖은 수모와 탄압을 받아온 울분을 참을 길이 없었는데, 이제 마침 선열들의 애국충성의 열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바로 그 자리에 그분들의 모습을 길이 기리는 작품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게 된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이유를 김종영이 1968년 유네스코 초청으로 파리를 가기 위해 일본 하네다공항에서 환승할 비행기를 기다리며 본 일본인들에 대한 기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의 경제부흥은 많이 들어 온 사실이기는 하나 그들의 생활습관이나 문화면에서의 발전상은 극히 표면적인 것 같았다. 그들의 공업력은 구미를 육박할 만한 생산을 할 수 있으리라 짐작이 가지만 인간적 정신상은 어딘지 빈곤해보였고, 그들이 과시하는 문화라는 것은 시종 서구문화의 모방으로 일관된 것 같았다. 대합실 상품진열창에 놓인 텔레비전에 마침 일본 토속 검무 같은 것이 방영되고 있었다. 장난인지 무용인지 훈도시, 하까마 차림의 사내들의 기성과 신경질적인 동작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악상(惡相)이었다. 칼 만지기를 좋아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잔인성의 일면인가 싶었다. 떠나는 사람과 전송객들 간에 작당이 되어 남녀노소가 그칠 줄 모르는 경례(敬禮)의 연속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풍습도 그저 버리지 못하는 것같다. 경례의 악용으로는 세계에 유례가 없을 것이다.”1941년 귀국 후 27년 만에 다시 본 일본인들에 대한 인상이다.

기념비 제작하다 ‘과로’ 로 쓰러져

작업은 1962년 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시작되었다. 김종영은 최의순을 불러“3·1독립선언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제작을 의뢰받았는데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작업일세”라고 하였다 한다. 그리고 학교 조소과 실기실 한편의 약 20평 됨직한 곳에서 최의순을 비롯한 제자 몇 명과 함께 점토작업을 시작하였다. 작품 규모에 비해 작업 공간이 협소한 관계로 작품 전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문밖으로 나가 봐야만 했다고 한다.

한편 김종영의 점토 작업의 특징은 최의순의 회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잘 다져진 점토를 준비해서 건네 드리면 곧바로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붙여나가는데 수정하는 일 없고, 다듬는 일이 거의 없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우성 선생의 작업은 붓을 손바닥에 꽉 잡고 필력을 쏟아 붓는 자신의 서예수법과 똑같은 것이다.”

이어지는 최의순의 회고, 점토 작업이 한창이던 어느 여름밤 최의순이 흙의 균열을 메우고 있었다. 그때 김종영은 소파에 앉아 잠시 쉬는 듯 보였는데 갑자기 옆으로 쓰러졌다.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자, 그는 선생님을 모시고 황급히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과로였다. 김종영은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마도 박갑성의 추측이 사실이었을 것 같다. <계속>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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