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화된 인물상 대신 ‘충혼’ 표현에 충실

김종영의 기념조각 ②-포항 <전몰학도 충혼탑>

김종영은 1957년 11월 11일자 『대학신문』에 서양미술의 명작을 소개하는 칼럼「태서명작(泰西名作)」에 로댕(Rodin)의 ‘발자크 상 (Balzac, 1898년 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 기념상이 완성된 것은 로댕 만년(晩年)인 1898년이었다. 인상(人像)이라기보다 암괴(岩塊)와 같은 이 조각의 예술적 가치를 당시 일반사회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제작 위촉자인 불란서문필가협회로부터 작품인수를 거부당하기까지 되었을 때 로댕은 비장한 태도로「예술가는 여자와 같이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부르지졌다. …”

▲ 포항 <전몰학도 충혼탑>
(사진 저작권자 영남일보)
우연인지 이 글을 게재한 그 해 6월 15일 오전 10시 포항 영흥산에서는 김종영이 제작한 <전몰학도 충혼탑> 제막식 및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이것은 전국학도호국단이 1950년 8월 11일 포항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48인의 학도의용군을 추모하기 위해 학생들이 모금한 성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6·25동란은 3년간 국군과 UN군 그리고 남한 민간인 사망자는 그 수가 100만 명을 넘긴 전대미문의 처참한 전쟁이었다. 그래서 정부와 전몰자 유관단체는 일찍부터 다양한 추모기념물 제작을 계획하였는데, 전쟁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던 1952년 4월 17일자 동아일보에 그와 관련된 기사 하나가 실렸다.병무국과 충혼탑건립위원회가 국군 전사자의 넋을 기리고 UN군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우기로 한 ‘충혼탑’과 ‘UN전우탑’의 시공설계 도안공모 심사 결과였다.

이 기사에 의하면 총 85점이 접수되었는데 그 중 교통부 시설국 건축과에 근무하는 이광노(당시 25세)의 도안이 모두 1등으로 당선되어 2천만 원의 상금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안에 따라 총 공사비 20억원으로 서울시를 비롯한 전국 9곳에 충혼탑이, UN탑은 서울 시내에 건립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1953년 7월 3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활발한 모금활동과 함께 성금이 답지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우선 서울에만 충혼탑을 건립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또 일주일 후 같은 신문에는 남산에 충혼탑 건립이 착수되었으며, 조각은 전적으로 윤효중씨가 맡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더불어 그 탑의 높이는 80척에, 제작비는 거의 1억 환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954년 12월 4일자 경향신문에 는 ‘중앙학도호국단’이 전쟁 중 전사한 학우들을 추모하기 위해 남산에 약 천만 환의 예산으로 높이 80척의 학생충혼탑을 설립할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이후 이 탑들이 완공, 제막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 대전 영렬탑
이와 달리 지방에서는 충혼탑들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1956년 대전 선화동에 높이 33m의 <영렬탑(英烈塔)>이 건립되었고, 그 이듬해 6월 6일 제막식을 가졌다. 또한 1957년 6월에는 포항과 부산에서 김종영이 제작한 <전몰학도 충혼탑>과 김경승이 설계하고 조각한 <충혼비>가 건립 제막되었다.

이중 주목할 것은 대전 선화동에 건립된 <영렬탑>이다. 이 탑은 원래 1942년 조선총독부가 전사한 일본군 위패를 두고자 한국에서 가장 큰 <충혼탑>으로 설계해 공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패전으로 인해 기단을 만든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충청남도는 1956년 1월 도민의 성금 1000만환을 모아서 6·25전쟁 중 전사한 대전 충남 출신 군경의 위패를 모시고자 몸체 부분을 쌓아 올려 마무리 공사를 했다. 그리고 ‘조형물’을 추가 설치하고 이름을 <영렬탑>이라 바꾸어 완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탑은 이후 건립된 충혼탑들의 설계에 많은 참조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영렬탑>은 일제의 잔재라는 논란 속에 2013년 철거되어 지금은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예술가는 여자처럼 정조 지켜야”

김종영이 발자크상을 소개하며 인용한 “예술가는 여자와 같이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로댕의 말은 그의 일본 유학시절 노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말을 염두에 두고 거의 동시에 제막한 세 개의 기념비를 비교해 보면 그가 제작한 <전몰학도 충혼탑>의 남다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957년 6월 6일 <영렬탑> 제막식 사진을 살펴보면 이 탑에 추가된 ‘조형물’이라는 것이 내부가 추모공간으로 설계된 기단 위 네 모서리에 설치된 작자미상의 육해공군과 경찰을 상징하는 4개의 동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부산의 <충혼비>는 ‘비’ 이기에 ‘탑’ 과는 규모와 형태가 다를 수밖에 없으나 김경승은 이 비에 육해공군을 상징하는 세 명의 근육질 남성누드를 부조로 제작 설치하였다. 기념비 제작의뢰자가 국가나 군경유관단체임을 감안한다면 군경 전몰자를 추모하는 기념물에 극적이고 영웅적인 모습의 인체 조각이 들어간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김종영이 제작한 <전몰학도 충혼탑>에서는 그런 인물상을 찾아볼 수 없다.

▲ <전몰학도 충혼탑>의 부조
(김종영미술관 소장)
김종영은 이 기념탑에 그동안 ‘천마상(天馬像)’으로 알려진 133.5×68 cm의 청동부조를 제작 설치하였다. 그러나 지금 학계에서는 이 ‘천마’로 알려진 동물의 이미지가 고구려 강서대묘에 그려진 ‘기린도( 麒麟圖)’의 ‘기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학설이 거의 정설화 되고 있다. 사실 경주의 천마총은 1973년 에야 발굴 공개되었기에 김종영이 이 부조를 제작할 당시에는 강서대묘의 기린도만이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이 기린은 우리가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기린과 달리, 사후세계로의 인도자이며, 하늘과 땅을 매개하고, 사후세계를 지켜주는 수호자로서 상상 속의 동물이다. 특히 기린은 ‘덕(德)’과 ‘인(仁)’의 상징이며 ‘장수(長壽)’의 대명사다.

김종영은 어린 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산화한 학도병들의 넋을 추모하는 탑에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기린의 도상을 부조로 제작 설치하였다. 그것도 깔끔하게 표면을 마무리한 것이 아니라 점토를 붙여 작업한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게 제작하였던 것이다. 당시 의뢰자들이 이 부조를 보며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 1957 김경승 부산 용두산 추모비
그가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공모전 수상으로 잡지 『문화세계』와 했던 인터뷰에서 ‘왜 여인의 누드인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그는 “여인의 나상을 취재한 것은 표현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하였다.


‘기린상’ 제작 자신 작품세계 지켜

그렇다면 비록 의뢰자의 주장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 기념비일지라도, 정형화된 영웅적인 인물상 기념비를 제작한 동시대 여느 조각가들과 달리 그는 ‘기린’상을 제작 설치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지키면서 충혼탑의 본뜻인 죽은 자에 대해 애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충실하려고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그의 ‘기린상’ 부조는 당시 의뢰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그가 1963년 국민 성금으로 <3·1독립선언탑>을 건립하였다. <계속>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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