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국제조각대회 한국대표로 선정

1953년 3월 14~4월 30일, 영국 런던서 조각대회 개최
56개 국가서 2500명 참가-국내선 김종영 등 4명 출품

1953년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입상 ②

『무명정치수』 라는 주제로 열리는 국제조각대회는 그 주제만큼이나 많은 논란을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회는 익명의 기부자가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국가적 지원금으로 £11,500까지 증액된 상금을 (어떤 통화로도 지급이 가능하다) ‘The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를 통해 수여한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단지 동유럽 국가들이 대회에 참가국 대상에 해당되지 않았다는 것이 유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7개국 3500명의 참가자들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그 중 상당수의 나라에서는 출품작에 대한 심사가 이미 완료되었다.

결선에 오른 후보자들은 Bill, Calder, Gabo, Pevsner, Fabbri, Minguzzi, Conzijn 그리고 Wotruba이며, 3월 초에 10명으로 이루어진 국제 심사위원단이 각 나라의 참가자들을 고려하여 80명의 수상자들을 선발할 예정이며, 선발된 수상자들의작품은 같은 달 Tate Gallery에서 전시 될 것이다. 최소한 £4,525의 상금이 예정된 대상 Grand Prize작의 설치를 위해 이미 제안된 여러 장소 중에서 그 작품이 설치될 곳은 서독의 Reuter박사가 제안 한 서(西)베를린에 있다. …”

▲ 무명정치수 도록 표지
1953년 1월 23일 영국에서 간행된 ‘The Spectator’ 에 실린『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에 관한 기사다. 당시가 미·소 냉전시기임을 감안하며 이기사를 읽어본다면, 독자는 이 대회가 이념적 색채가 강한 공모전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 이 국제 조각공모전과 관련된 기사는 약 10개월 전인 1952년 3월 20일자 ‘경향신문’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국 「런돈」 현대 예술연구협회에서는 금년 중에 개최되는 국제조각대회에 한국작품출품을 금반 한국정부에 의뢰하여왔다는 바 동 국제조각대회는 영국 「런돈」에 있는 전기현대예술연구협회 주최로 거행된다고 한다. 그런데 동 조각대회 출품 주제는 「무명의 정치수」 라고 하는 바 출품 중에서 八十 점을 입선케 하고 이에 입선된 자에는 二十五 「파운드」 그리고 八十 점 입선사(‘입선상’ 오기인 듯함)중에서 八점을 당선케 하여 二백五十 「파운드」 팔 점 당선자 중에서 四점을 특선으로 하고 一천 「파운드」 그리고 최우수작품 一점은四천九백二十五 「파운드」 를 상금으로 주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문교부당국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동 대회에 출품을 희망하는 한국 조각가는 三월 三十一일까지 문교부 문화국에 연락 문의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두 기사를 비교해보면 경향신문의 기사가 공모전에 대해 매우 소상하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공모전을 주최한 ‘The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가 접수마감 며칠 전에 배포한 보도 자료에 의하면 52개국에서 대략 3,000명의 작품이 접수되었으며, 계속해서 많은 작품이 도래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주최 측은 여러 나라의 응모작가들이 마감일을 연장해 줄 것을 요청해와 마감일을 3월 31일에서 6월 1일로 연장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두 명의 조각가가 출품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성명은 기재하지 않았다.

다행히 한국인 출품자의 명단은 국내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출품자 수가 보도 자료와 차이가 있다. 1952년 4월 4일자 경향신문에는 출품자가 윤효중, 김경승, 김종영, 김세중으로 결정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편 5월 30일자 신문에서는 주최 측으로 부터 윤효중, 김경승 두 조각가가 접수되었다고 한국정부에 통보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4월 2일까지 56개국에서 2500명이 접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접수 마감일이 6월 30일이라 하였다. 한편 김종영과 김세중의 작품이 접수되었다는 보도는 찾아볼 수 없으나, 접수마감 후인 8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현재 조각가 윤효중, 김경승, 김종영, 김세중씨 등 4명의 조각품을 동 대회에 보내기로 되었다.” 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주최 측의 보도 자료와 경향, 동아일보의 신문기사를 종합해 보면 복수의 한국조각가가 출품하였으나, 그 중 한국대표로 선정 된 작가가 김종영이었다.

당시에 출품국가별로 국내예선이 있었다. 이는 주최 측의 보도 자료와 전시도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데, 한 나라에서 10명 이하의 작가가 출품한 경우는 국내예선을 거치지 않고 주최 측이 구성한 국제심사위원단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작품을 선정하였다. 도록에 의하면 최종적으로 140명의 명단이 게재되었는데, 그 중 110번부터 140번까지가 국제심사위원단에 의해 선정된 작품인 것이다. 김종영은 대한민국작가로 133번에 당당히 올라 있다. 번호는 국가명의 알파벳순으로 작성되었다.

당시 이 도록은 우편으로 일본 도쿄를 거쳐 부산의 미술대학으로 배달되었다. 그리고 김종영은 이 도록을 소인이 찍힌 봉투째로 평생 소중히 간직하였으며, 지금 그 도록은 김종영미술관에 유품으로 봉투와 함께 잘 보존되어 있다. 무슨 이유에서 그는 이 도록을 그토록소중하게 보관한 것일까? <계속>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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