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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한국미술 최초 국제조각 콩쿨 입상


김종영, 한국미술 최초 국제조각 콩쿨 입상

한국 조각예술 국제적으로 알려 큰 의미

1953년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입상 ①

1974년 7월 4일 동아일보 1면에 『차이코프스키 음악제 蘇人(소인)과 共同 二位 - 一位도 蘇人 정명훈군, 蘇서 순회연주계획』 이라는 기사가 실렸다.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서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아시아필하모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정명훈(1953~ ), 바로 그에 관한 기사였다.

냉전체제에서 미·소 화해의 데탕트시대로 전환되던 시기에 공산국가 소련에서 개최된 음악콩쿠르에서 분단국가 대한민국 청년의 수상은 국가적 경사였다.7월 12일 귀국한 정명훈은 김포공항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카퍼레이드를 하였고, 3일 후 박정희 대통령을 접견하고 다과와 함께 훈장까지 받았다. 40년이 지난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전쟁 중 입상 ‘민족적 쾌거’

정명훈의 수상이 있기 21년 전인 1953년, 이 땅의 남과 북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 그해 5월 3일, 경향신문에는 『한국미술 최초의 영예-미대 김종형(김종영을 잘못씀)씨 작품 「무명정치수」 런던 국제조각 콩쿨에 입상』 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 1953년 5월 3일자 경향신문 기사
“약진도상에 있는 우리 미술계에 새로운 희소식이 있다. 영국 런던현대미술협회 주최로 방금 개최 중에 있는 국제 조각 콩쿨전에 금년 초에 한국의 대표적 작가 3인이 출품한 바 있었는데 그중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각과 주임교수 김(金鍾형)씨의 작품이 입상되었다는 통지가 4월 27일 미술대학으로 전하여 왔다. 동 콩쿨은 전 세계 각국의 대표적 조각가에게 현대미술협회로부터 초청을 받은 작가가 출품하였던 것인데, 제명은「무명정치수」이었으며, 심사의 최고 책임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헨리 무어 씨였다. 그리고 출품점수는 50여 개국에서 4000여점에 달하여 전 세계적인 관심을 총 집중시켰던 것이 니만치 김(金鍾형)씨 작품의 입상은 한국 조각예술을 국제적 위치에 이끄는 바그 의의가 자못 큰 것이라고 하겠다.”

1953년 김종영의 수상은 동족상잔이라는 참혹한 시기였음을 감안할 때 민족적 쾌거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미술계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김종영의 수상은 그 의미와 가치가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도 1941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948년 3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부임하기까지 7년간을 향리에 칩거하며 일체 작품발표를 하지 않았던 김종영이 국제공모전에 출품-수상하였다는 것은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1949년 ‘제1회 미술대전’ 출품

그럼 이제 그가 서울대학교에 부임하여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공모전에 출품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김종영은 휘문고보 시절 은사였던 장발의 부름으로 1948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조소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해는 국립대학설치안으로 비롯된 시위가 좌우이념대립의 이념 투쟁으로 변질된 소위 ‘국대안 파동’ 이 수습된 이듬해였다. 1949년 11월 21일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이 개최되며 김종영은 추천작가로「여인좌상」을 출품하였다.모든 것이 안정되는 듯했으나 1950년 6월 25일 6·25동란이 발발하였고,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서울은 9·28 수복 때까지 석 달간 인민군 치하에 있어야 했다.

6월 28일 전쟁 발발 직후 장발은 경기도 광주로 피난을 갔고, 김종영의 휘문고보 선배이며 조소과 교수로 있었던 윤승욱은 수원으로 피난 갔다. 훗날 윤승욱은 행방불명되었는데, 좌익학생들이 그를 찾아왔던 점을 미루어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민군 치하에서 장발은 파면되었으며, 신임 미술부 학장은 국대안 파동으로 서울대 미대 교수를 그만 둔 근원 김용준이 임명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 임명된 직원들은 모두 파면되었다. 이후 김용준은 서울 수복 때 퇴각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하였다.

▲ 1953년 부산 송도 가교사. 왼쪽부터 박수룡, 홍성문, 심봉섭, 김세중, 강태성, 앞줄 왼쪽부터 김종영, 송영수 남자모델.
당시 김종영에 대한 기록은 별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박갑성은 그 때의 김종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6·25동란 때 각백은 돈암동의 한옥에 살고 있었다. 이 엄청난 재난 속에서 각백이 나에게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아. 움직일수록 적탄을 맞을 기회가 많아지니까’ 하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견디다 못해서 가족을 이끌고 8월 중순께 과천으로 피란했다. 9·28이 되어서 다시 만났을 때 각백은 벽에 걸린 족자를 가리키면서 저것이 살려주었다고 했다. 족자 뒤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밤에 인민군들이 플래시를 들고 찾아 왔을 때 종이 한 장 사이에 두고 간이 콩알만 했다고 말했다.그 족자에는 초서체로 ‘必勝(필승)’ 이라고 쓰여 있었다.”

박갑성의 기억에 의하면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와 김종영은 장발 학장이 부산으로 떠나는 날 영등포역에서 만나 같이 떠나기로 했으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각자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향 창원으로 떠난 김종영은 우여곡절 끝에 그 다음해 부산에서 박갑성을 만났다.

그들은 전시연합대학에 가서 수소문하여 미술대학 사무소의 소재를 확인하고, 교무행정을 보던 김시장이라는 사무원을 만나 학교 관련 서류 일체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장발 학장이 1950년 말 미국 미네소타대학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자, 그 후임으로 미학을 담당하던 이재훈이 학장서리로 근무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대, 부산에 전시대학 설치

1·4후퇴 후 강의실 공간 부족으로 출범한 전시연합대학이 공간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1952년 5월 말 해체되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는 피난지 부산에 전시대학을 설치하였다. 미술부는 처음에 일본식 가옥을 사용하다가 송도에 있는 ‘해송관’ 이라는 일식집의 다다미방 몇 개를 빌려 1953년 9월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사용하였다. 장발은 1952년 말 귀국하여 학장으로 근무하였으며, 1953년 4월 미술부가 미술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초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한편 1952년 12월 15일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제4회 미술전이 서대신동 부산대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전시연합대학체제가 끝나갈 무렵인 1952년 3월 20일 경향신문에 「우리 작품을 요청 국제조각대회에서」 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계속>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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