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목표는 통찰’ 함축·비유적 표현 많아

교육자로서 김종영은 어떠했을까? ②

최의순의 경우가 「침묵은 금, 웅변은 은」이라는 영국 속담을 항상 견지하던 김종영 식 교육 방법이었다고는 하나, 실기실의 모든 학생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지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목표는 통찰” 이라고 한김종영이 수업시간에 어떻게 자신의 예술관을 학생들에게 표현하였을까 궁금해진다.

제자들이 ‘말수가 적은 선생님’ 으로 기억하는 스승 김종영에 대해 현 김종영미술관 최종태 관장(1958년 졸업)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김종영 선생이) 이쪽에 와서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는 거여. 누구를 향해서 얘기를 안해요. 이 양반은 고쳐주고 그런 걸 안 해야. 그냥 이렇게 얘기여, 얘긴데 자기 딴에는 뭐가 있지요. 여기 핵심이 있는데 그거를 설명적으로 안 하고, 그래서 열나게 얘기를 하는데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듣고, 못 듣는 사람은 못 듣고, 할 수 없어, 그러고 나가요. 항상 그랬어. 그래서 김종영 선생이 요때 우리 다닐 적에 얘기를 제일 많이 했어요….”

“김종영은 아주 부득이한 경우 멀리 돌려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는 친구 박갑성의 회상과 최종태 관장의 구술을 보면, 말수가 적은 김종영이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한 말들은 함축적이며 비유로 가득 차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제자들도 최종태 관장과 유사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여러 제자들의 회상을 들어보자.

말수 적어 ‘무서운 선생님’ 회상

▲ 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사진(가운데 의자에 앉은 이가 김종영.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최의순. 그 뒤에 서있는 이가 최종태.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송영수, 그 오른쪽이 강태성, 그리고 그 오른쪽이 최만린. 뒷줄 맨 오른쪽이 김세중)
『수업시간 종이 울리면 정확하게 선생님이 들어오신다. 그 커다랗고 시커먼 출석부를 옆에 끼고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열 명 조금 넘는 우리들, 모델대 옆에 오신 선생님은 천천히 우리들을 하나하나 출석 호명을 하신다. 오늘은 어떤 말씀을 하여 주실까? 선생님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거의 혼잣말처럼, 천천히 그리고 떠듬떠듬 한 말씀 하신다. “그래, 우리는 우주의 질서를 찾아야 돼.” “조각가는 물질의 본질, 생명의 본질을 찾아 가는 여정이야.” 이 한마디 하시고 그대로 선 채로 교실을 한번 휙 둘러보시고 나가신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1967년에 졸업한 심정수의 회상이다.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툭 던지는 모습은 신입생 최의순이 김종영선생과 면담했을 때 경험한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뜬금없는 질문에 대한 의도를 자세히 설명해 준경우도 있다. 1975년에 졸업한 김병화는 자신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슬퍼서 우느냐? 울어서 슬프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우성 김종영 선생이 물으셨다. 우리는 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묵묵부답,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곧 그 표정을 읽으셨던지 뜻풀이를 해 주셨다. 울어서 슬프다는 것이다. 물론 슬퍼서 우는 것이 정상이지만 지금 질문의 요지는 그런 정상적인 자연현상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의미상의 물음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억지 울음 같지만 계속 초상집 곡쟁이처럼 꺼이꺼이 울다보면 그동안 슬펐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되살아나서 급기야는 정말 슬퍼서 울게 되는데, 그것처럼 작품도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무작정 덤벼들어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솜씨도 늘고 영감도 떠올라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머 감각 풍부해 수업시간에…

한편 김종영을 ‘무서운 선생님’ 으로 회상하는 최의순과 달리 김종영은 상당한 유머 감각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1962년에 졸업한 이춘만의 회상을 들어보자.

『2학년, 김종영 선생님의 고미술 강의는 한문과 미학차원의 어려운 문장에, 저음의 일관된 톤으로 조용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깨어듣지 않으면 졸게 되는데, 어느 날 강의 중에 “며칠 안 씻은 발을 놋대야의 뜨거운 물에 담그고 때를 민다. 한없이 검은 때 흰 때가 쌓인다” 고 하셨다. 누군가 웃음을 못 참고 쿡 웃자, 키 크고 점잖은 선생님의 때 미는 모습을 상상하며 모두 마음껏 웃었다. 선생님의 4년 간 강의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웃음이 터진 순간이었다. 이 웃음은 다음 기와 이야기로 이어졌다. “창덕궁의 기와는 처마의 눈, 비가 흐르는 골이 되는 암키와와 그 골을 누르는 수키와, 기와 끝을 막는 암막새와 수막새 이렇게 4종류의 기와와 지붕 양 끝에 있는 치마기와와 망와기와로 이루어진다.이 기와 같은 유물, 유적과 그 위에 새겨진 용, 새, 짐승 무늬 같은 샤머니즘적인 인류천성의 상징도 언젠가 풍화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근육을 덮은 때를 벗김에서 이탈된 자유를 갖는 것처럼 화석화되어 때처럼 쌓인 인간의 개념들도 필연적이라 할 수 있는 자연회귀적인 속성으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모든 존재와 같은 이치이다.”』


1969년에 졸업한 박충흠은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언젠가 방학이 끝나고 난 첫 수업시간에 그간의 얘기들을 나누던 중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지내셨느냐고 여쭈었을 때, “하루 종일 하늘 쳐다보고, 나무도 구경하고 풀도 보다가 할 일 없으면 잠을 자는데 지루하면 쉬었다가 또 잔다” 라는 말씀에 저희들은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지만 그 말씀의 숨은 뜻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참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추구한 김종영다운 대답 아니겠는가?

김종영, 유유자적한 삶 추구

『어느 풍(風)이 연상되는 소조작업-점토로 인체를 만드는 작업-에 열중하는 학생 옆에서 하시는 말씀이 “말이야! 미국에 있는 어느 졸업생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삼라만상의 계절에서부터 건강은 어떠시고, 작품생활은 어떠하며, 학교는 별일 없는지 하며 장황하게 이야기 하다가 끝에 가서는 ‘다름이 아니오라 졸업증명서가 필요한데…’ 라고 말하더라.” 소조 마무리 작업할 때 얼굴만 열심히 만들고 있는 학생에게, “아무개 군! 이젠 장갑 좀 벗기지, 양말도 벗기고.”』 1975년에 졸업한 김영대의 추억담이다. 이렇게 여러 제자들의 회고 속에서 김종영의 뛰어난 유머감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김종영은 말수는 적었으나 자신의 예술관을 학생들에게 직설법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항상 멀리 돌려서 설명하였다.

따라서 적은 말수임에도 각각의 말들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수상록인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 그는 자신의 작업 뿐만 아니라 학생과의 대화에도 이 신념을 지켰던 것 같다.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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