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체득’ 중시

교육자로서 김종영은 어떠했을까? ①

1941년 3월 24일 김종영은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소조부를 졸업하고 그 해귀국하였다. 1936년에 동경으로 떠났으니 만 5년 간의 유학생활이었다. 귀국 후 그는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부임하기 전까지 7년 동안 고향 창원에서 칩거하였다. 그7년이라는 세월은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의 발발, 일본의 항복과 해방, 이념에 의한 UN신탁통치 안에 대한 찬반 분열 그리고 남북분단에 이르는 격변의 시기였다.

▲ 오른쪽부터 백문기, 김세중(베레모), 김종영(검은색 양복), 윤승욱(제일 왼쪽 옆얼굴만 보이는 사람) 서울대 조소과 실기실 사진으로 1948년경으로 추정
해방과 함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미군정청 산하 서울시 학무국장에 장발이 취임한다. 그리고 그의 주도 하에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가 설립된다. 장발은 조소과 교수로 휘문고보 제자인 윤승욱을 영입한 후 두 해가 지나 창원에 머물던 김종영을 서울로 불렀다. 서울대 조소과 1회 입학생이자 1회 졸업생으로서 현재 예술원 회원인 백문기(1927~ )의 회상에 의하면 김종영이 서울대로 부임하면서 윤승욱은 3~4학년을, 김종영은 1~2학년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6·25 동란 중 윤승욱이 실종되자 김종영이 조소과 전체를 지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김종영은 서울대 미대의 1세대 교수로 서 1980년 정년퇴임 때까지 32년간 후학을 지도하며 우리나라 현대조각의 초석을 다지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렇다면 동경유학시절, ‘예술을 종교’라고 생각하며 수도자와 같은 삶을 선택한 작가 김종영이 교수로서는 후학을 어떻게 지도하였을까? 친구 박갑성은 김종영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각백(김종영)은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습관이 몸에 젖어서 제3의 천성처럼 되어 있었다. ‘침묵은 금, 웅변은 은’ 이라는 영국의 속담을 항상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그러나 아주 부득이한 경우에는 멀리 돌려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각백은 자기 신변의 얘기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고 회고하였다.

그래서인지 스승 김종영에 대한 후학들의 회상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선생님은 말수가 적었다” 는 것이다. 1953년 입학하여 1957년 졸업한 최의순(193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명예교수)의 스승 김종영에 대한 회상을 들어보면,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그의 교육방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최의순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전 피난지 부산에서 입학하였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종영이 신입생인 그를 면담 차 불러서는, “예술가는 혼자 걸어가는 길일세. 예술가는 혼자 추구하는 거고, 혼자 공부하는 거다. 딴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자신이 하는 거니까 그리 알라” 는 말을 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그는 얼마간 머뭇거리다 머쓱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스승 김종영을 ‘무서운 선생님’이라 고 회상하는 최의순은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일화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사연은 이렇다.

김종영선생이 어느 날 아침 일찍 2학년인 자신을 3학년 교실로 불러들이더니 별다른 말도 없이 갑자기 누워있는 사람을 만들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제 막 1학년 공통기초실기를 마치고 2학년 전공과정을 시작하여 두상(頭像)을 처음 만들던 시기였기에, 난데없이 와상(臥像)을 만들라고 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선생님의 말씀을 이행하고자 그는 어설프게 철사와 각목으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붙였지만, 흙이 버티지 못하고 이내 떨어져 오후 내내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던 김종영선생이 저녁 6시가 되자 이윽고 한마디 한 것은, “이제 그만 정리하고 들어가라” 하는 것이었다. 최의순은 집으로 가는 길에 선생님이 자신을 골탕 먹인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를 그만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밤새 그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다음 날 일단 학교에 갔다고 한다. 그런데 2학년 교실에 들어가 자신이 만들고 있던 두상을 보는 순간 새로운 깨달음이 밀려왔다는 것이다. 어제 커다란 와상을 만들며 고생을 하고 났더니, 그 전에 만들고 있던 두상이 너무나 약하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두상을 만들며 흙이 손에 묻을까봐 조심스레 야금야금 붙였으나 그것보다 큰 와상을 만들며 과감하게 흙을 만지게 되었고, 더불어 손아귀에 힘도 생겨 흙이 무섭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최의순은 이 일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선생님이 그런 골탕을 먹였다는 것, 달리 말하면 몸으로 느끼는, 체득하게 가르쳐주신 선생님의 사려 깊은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침묵은 금, 웅변은 은’이라는 영국의 속담을 항상 기억하고 있는 ‘김종영 식’ 교육방법의 한 예일 것이다. <계속>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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