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도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하네”

카라바치오, 렘브란트, 반 고흐, 카미유 클로델, 피카소, 모딜리아니, 프리다칼로, 뭉크, 툴루즈 로트렉, 잭슨 폴록, 바스키아 그리고 장승업, 이중섭….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예술적 삶이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반고흐의 영화가 열 편 넘게 제작된 것을 보면 대중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 북한산(종이에 펜, 매직, 수채, 1973년, 53x38cm)
그리고 우리는 이런 영화들 포스터에서 십중팔구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천재 화가’ ‘요절한 천재 화가’ ‘비운의 천재 화가’와 같은 선전 문구를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이들의 삶이 하나 같이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종영의 삶에서는 극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동경 유학시절에 친구 박갑성과 나눈 이야기를 들어보자.

학생시절 각백(김종영)은 이런 말을 했다.

“예술도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하네.” 해질 무렵이었다. 우리는 하숙 근처에 있는 호숫가를 거닐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아마 예술과 종교는 밀접한 관계가 있겠지만 동일한 것은 아닐 걸세. 예술은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지는 못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성화(聖化) 하는 능력은 초자연의 진리 속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네.”

이때 각백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네는 그 길을 가는 것이 좋을 것이고, 나는 내가 택한 길을 가는 것이 좋네.” 하면서 묵묵히 걷기만 했다. 이처럼 의견은 서로 달랐으나 대립하기보다는 사물을 근본적인 각도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파악하려는 태도는 공통되어 있었다.

만년에 김종영이 당신 집을 방문한 제자이며, 현재 김종영미술관 관장인 최종태에게 거두절미하고 했던 말이다.

“신(神)과의 대화 아닌가.”

두 대화를 통해 김종영은 일생 동안 예술을 일종의 종교와 같은 범주 안에서 생각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노교수가 제자에게 한 한마디 말은 청년학도 시절 친구에게 했던 말에 대하여 그가 반세기에 걸쳐 깊이 성찰하였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성찰에 대한 깨달음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종영에게 예술이 하나의 종교였다면 그의 삶은 영화 속 화가들의 ‘불꽃같은 삶’ 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 않았겠는가? 예술가로서 김종영의 삶이 ‘수도자의 삶’ 과 같은 것이었다면, 그에게 예술이란 진정 종교이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이쯤에서 김종영이 가장 존경했던 추사 김정희와 그가 비교 대상으로 삼아 서양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인식하였던 세잔느의 삶을 잠깐 살펴보자.

“예술은 종교이며, 그 목적은 사고의 고양이다” 라고 말한 세잔느의 일상에 대해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 그는 오리엔트 풍 양탄자에 놓인 세 개의 두개골을 그리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매일 아침 6시부터 10시 30분까지 그는 이 작업을 계속해 왔다. 이것은 그의 생활습관이었다. 아침 일찍 작업실로 나와 6시부터 10시 30분까지 그림을 그리고, 엑스로 돌아가 식사를 하고, 풍경을 그리기 위해 곧바로 모티프로 가서는 저녁 5시까지 앉아 있고,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는 즉시 잠자리에 드는 생활을 일 년 내내 계속해 오고 있는 것이다. …”

유족들의 기억에 의하면 김종영의 삶은 세잔느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독서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으며, 학교 제자들을 지도하는 일과 작품제작 그리고 집필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런 일상이 평생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삶을 친구 박갑성은 “한 평생을 임산부처럼 살았다”고 기억했다. “임산부처럼 몸을 조심하며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이다. 여기서 김종영의 아호 ‘우성(又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우성’은 부친을 사모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아마도 성(誠)을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고자 한 뜻도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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