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 대표 뉴스 - 자매지 일간보사
의학신문
상단여백
HOME 기획연재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우성 김종영
왜 김종영 작품에선 왜색을 찾을 수 없나?


왜 김종영 작품에선 왜색을 찾을 수 없나?

서양미술 도입기가 일제강점기와 중첩되며 발생한 한국미술계의 문제점을 김종영은 ‘한거’ 를 통해 극복할 수 있었으며, 조각예술의 본질을 탐구해서 왜색과는 무관하게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지난 세기 이 땅에 서양미술이 도래하며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고 하였다. 첫째는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을 통해 서양미술이 도입되어 일본식으로 해석된 서양미술이 이 땅에 이식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서구 근대 체험의 부재로 인한 서구근대미술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부족과 이에 따른 편식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日, 조선미술인 대거 관제미술 동원

이런 문제의 원인은 일제강점기 국내에 미술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미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필히 일본유학을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유일한 신진작가 등용문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 를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였고, 심사위원들은 일본에서 초빙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한국인으로서 입선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취향을 일정부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특히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며 전쟁이 확대 격화되며 일본은 전쟁 독려를 위해 조선인 미술인들을 대거 관제미술에 동원하여 그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당시 몇몇 작가들의 작품 활동은 선전에 참여로 인한 왜색(倭色)문제와 더불어 친일논란의 정점에 있는 것이다.

▲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실기실에서 급우들과 함께 (가운데 김종영).
조각을 배우러 동경미술학교로 유학

김종영 역시 당시 여느 미술학도와 같이 일본유학을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한결같이 그의 작품에서 일본의 영향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누구의 말과 같이 긴 장마에 오로지 집안에 있지 않고 어딘가 잠깐이라도 나 다녔다면, 아무리 조심하였어도 비에 옷이 조금이라도 젖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하니 김종영의 작품에서 왜색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의 작품에서는 왜색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김종영은 ‘전통에 대하여’ 라는 제목의 글에 동경미술학교로 유학 갔을 때의 심정을 비교적 상세히 적어 놓았다. 그는 동경미술학교로 조각을 공부하러 갔으나 학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썼다. 그 이유는 당시 동경미술학교 조소과의 분위기가 인체의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그는 그러한 것보다는 보편적 형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리스 고전 조각에 집중되었고, 부르델(Antoine Bourdelle, 1861-1929)의 기념비적인 형태라든가 마이욜(Aristide Maillol, 1861-1944)의 볼륨이나 매스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심들로 인해 김종영은 점차 입체와 구조에 대한 논리적인 사유를 통해 자신만의 조각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한다. 그래서 그는 일본 문부성이 주관하는 ‘문부성미술전람회’ 의 출품작이나 교수들의 작품을 보는 것보다는 서점에 가서 서양 조각가들의 작품집을 보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서양 작가의 화집은 구하기도 어려웠고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반 메스트로비치(Ivan Mestrovic, 1883-1962), 마이욜, 부르델, 콜베(Georg Kolbe, 1877-1947), 아르키 펭코(Alexander Archipenko, 1908-921), 데스피오(Charles Despiau, 1874-1946) 등의 작품집을 사서 즐겨봤다고 한다. 비록 사진으로 보는 것이기는 하였으나 이들 작품의 예술성은 일본의 조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김종영은 서구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조각이라는 것이 인체를 조각하는 기법을 넘어 어떤 예술적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예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이것은 김종영과 동경유학시절 2년 반 동안 하숙생활을 함께 한 오랜 친구 박갑성의 회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김종영이) 스케치북 한 권을 들고 학교에 갔다 오면 대개는 집에서 이 책들(서양 작가의 화집)을 보고 지냈다. 게오르그 콜베의 작품집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상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의 불안, 회의, 반항 같은 것이 나타나 있다고 공감하던 기억도 이때 무렵의 일” 이라고 회고하였다.

▲ “소녀상” 석고, 27×22×42cm, 1940년 이전, 김종영미술관 소장.
출품보다 서양조각가 작품 탐독 집중

이런 학생의 작품에 대해 당시 지도교수들이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김종영이 훗날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을 적은 글에서, 지도교수였던 아사쿠라 후미오(1883-1964)는 언제나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하리꼬(종이인형)같다고 비꼬았다고 쓴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학생 김종영의 행보는 남다른 데가 있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예술가, 수도자 그리고 철학자에게는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어느 철학자의 말에 의하면 ‘절대고독’ 이라 할 수 있는 ‘한거(閑居)’, 즉 집에 한가로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한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그들이 하는 일은 번잡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사색하며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종영이 바로 한가로워 보이는 그러한 유학생이었다.

‘한거’ 로 한국 추상조각 선구자 우뚝

김종영은 유학시절 당시 미술학도들이 작가로서 인정받고자 기회만 있으면 전시회에 참가하고자 하였음에도 “그는 의무적인 것 외에는 한 번도 전시회에 참가한 일이 없었다. 그는 조각으로 출세하고 조각으로 영화를 누릴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고 박갑성은 회고하였다. 그래서 인지 김종영은 1941년 귀국 후 여느 한국인 미술가들과 달리 ‘선전(鮮展)’ 에도 일절 출품하지 않고 고향에 칩거하였다.

훗날 김종영은 “예술의 목표는 통찰” 이라고 말하였다. 한가함이 없다면 통찰은 불가능한 것이다. 박갑성의 표현과 같이 “빈둥빈둥거리는 정신의 여유를 가진 그” 였기에 김종영은 오광수가 지적한 지난 세기 서양미술 도입기가 일제강점기와 중첩되며 발생한 한국미술계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었고, 조각예술의 본질을 탐구해서 왜색과는 무관하게 시대적 소명을 다하며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의학신문  webmaster@bosa.co.kr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학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