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라서 행복해요!

“이. 십. 일. 층입니다.”

심호흡을 한다. 아침 첫 회진, 21층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하루가 열린다. 전 층, 전 병동의 처치실과 선별된 고위험환자들의 병실을 회진하기 때문에 맨 윗 층인 21층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병실 하나하나를 살피며 병동 한 층 한 층을 걸어 내려오게 된다. 처치실에 환자가 없거나 선별된 고위험 환자가 없는 층의 병동이라도 예외 없이 들러 병동 선생님들과 인사를 하고 미처 선별해내지 못한 고위험환자는 없는지 확인한다. 매일 하는 2번의 회진이지만 매번 긴장된다.

하루의 시작은 ‘회진 준비’

사실, 하루의 시작은 ‘회진’이라기보다는 ‘회진 준비’이긴 하다. 전날 심정지가 발생한 환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그동안 구축해둔 시스템에 따라 고위험환자들을 선별하고 있으면, 팀의 교수님들이 각자의 시스템에 따라 선별한 고위험 환자들의 명단과 마취과에서 선별한 수술 고위험 환자의 명단이 넘어온다. 그리고 수시로 날아오는 이상검사결과 (CVR, Critical Value Result) 문자들. 선별된 고위험 환자들의 검사와 영상 결과들을 확인하고 상태를 파악하다 보면 금새 회진 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속대응팀이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냐”고 묻는다. 우리 팀은 고위험 환자를 미리 선별해서 조기에 개입하는 일을 한다. 외국, 특히 호주에는 이런 조기대응시스템 (RRS, Rapid Response System)이 활성화되어 있지만 국내에는 아직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하는 도입 단계로 서울아산병원의 MAT (Medical Alert Team), 삼성서울병원의 SMART (Samsung Medical Alarm Response Team) 등에 이어 한양대학교병원의 HaRRT (Hanyang Rapid Response Team)가 활동하고 있다. 좀 생소한 개념이긴 하지만 각 과에서 열심히 치료중인 환자에게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생길 경우에 환자를 함께 치료하는 원내 의료의 이중 안전망으로서 ‘위기의 환자 구출하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올해 5월에는 이와 같은 주제로 간호국과 함께 간호사 보수교육을 주최하기도 하였고, 실무에 도움이 되었다는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였다.

각 팀별로 특성과 장단점이 다르겠지만 우리 팀은 대형병원들과 달리 2명의 교수와 간호사 2명 소수의 인원으로 이루어져 있어 각 팀원 간의 역할과 팀 웍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의사와 간호사간의 의사소통의 부재가 점차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즘, 의사의 처방 및 결정과 임상 간호 업무에 대해 서로의 정보와 의견을 그때그때 적극적으로 나누고 공유하는 ‘이상한’(?)팀이기도 하다. 업무를 통해 많이 배울 수 있고, 간호사로서 자신이 속한 팀의 기획과 정책 결정에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는 장점이 있다.

응급상황의 중간자 큰 부담감

그러나 항상 응급상황이라는 긴장되는 상황에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간호와 관련된 결정을 하고, 의사의 결정과 계획을 읽으면서 비디오 후두경이나 현장 ABGA 장비, 고유량산소요법장비와 같은 특수한 장비를 다루어야 하며, 저마다 특성이 다른 각 병동의 연차가 다른 여러 선생님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자칫 실수하면 환자가 악화될지 모른다는 점과,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중간자로서의 역할이 가장 큰 부담감으로 남게 된다.

약 1년 반 전, 중환자실 간호사로서 10년 가까이 일 해오다 처음 신속대응팀에 왔을 때는 어차피 중환자를 보는 업무이니 그냥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의욕만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중환자실에서는 늘 4명의 환자만 봐 왔었건만 병동의 고위험 환자는 늘 두 자릿수 인지라 환자 4명의 이름과 진단명을 파악하고 나면 더 이상 환자가 머리에 입력되질 않았다. 주로 같은 중환자실 간호사 선생님들 내부에서의 의사소통을 해왔는데 전공의나 팀의 교수님들과도 일하다 보니 분위기도, 용어도, 의사소통 방법도 전혀 달랐고 새로 익혀야 했다. 멋지지만 생소한 장비들에도 익숙해져야 하고, 간호학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의학적인 분야에도 눈을 떠야 하는 것까지. 하나하나에서 너무도 작은 나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활동 초반만 해도, 기관내삽관이 결정되어 병동에 “호흡부전이 우려되는 환자이니 기관내삽관 준비 부탁드려요.”라고 말씀드리면 ‘주치의 선생님은 그런 말 없었는데요.’라던가 왜 병동이 같은 간호사의 order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반응이 있어 의사소통 단계에서부터의 어려움도 많았지만 지금까지 달려온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의학적인 view를 이해하고 손발을 맞추되, 간호학적인 view를 유지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처음에는 서먹하던 병동 선생님이 이제는 많이 믿어주시고 손발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각 병동에서 환자를 보시다가 간호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 먼저 믿고 질문해주시기도 하고, 음료수를 챙겨주시기도 한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여러 응급 상황에서 병동의 물품과 각자의 역할, 그리고 환자의 Vital sign을 monitoring 하면서 전체를 조율하고 나서 그 한 case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나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 나로하여금 계속 앞을 보고 달릴 수 있게 한다. 물론, 팀의 교수님들과 간호국 선생님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기회도 되었다.

신속대응팀 간호사의 존재감

또 아직은 간호사의 전문적인 영역에 대한 인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 혼자 회진을 돌 때, 의사가 아닌 간호사가 환자를 보면서 과연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환자와 보호자를 대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한동안 슬럼프도 겪었다. 처음에 혼자 가서 고유량산소요법 장비 적용을 시작하자 간호사가 뭔가를 한다는 점에 강한 난색을 표하던 어느 환자와 보호자는 며칠 후 ‘파란 옷 입은 간호사’만 찾아 새벽부터 병동의 call을 받고 몇 번이고 올라가야 했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시기였지만 오히려 힘이 되었다. 아, 내가 신속대응팀 간호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도움을 줄 수 있구나...

그리고 정말 기억에 남는 또 한 분의 환자가 있다. 말기암 환자로 관리 중간에 심폐소생술금지동의서를 받기는 했지만 팀의 고유량산소요법 장비를 사용하고 있어 계속 보고 있는 상태였다. 고유량산소요법 적용을 많이 힘들어 하고 불안해하는 환자였는데 그때마다 정서적 지지도 해드리고 세부적인 setting도 조절해가면서 봤더니 호흡도 안정이 되고 SpO2도 올라가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와 보호자가 너무도 기뻐했다. 그동안 생각해오던 진짜 간호의 큰 줄기 중의 하나는 의학적인 문제 그 이상을 개개인에 맞게 조율해 줄 수 있는 이기에. 이렇게 잠시나마 간호사라서 행복한 시간들이 있어 다른 시간들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거구나 싶었다. 이후 그 환자는 사망했음에도 그 환자의 보호자가 고객의 소리에 신속대응팀과 그 팀의 간호사 덕분에 많은 힘이 되었다는 칭찬의 글을 올려 주셨다. 글에서 보호자의 마음이 전해졌다.

“이. 십. 일. 층입니다.” 새로운 하루가 열릴 때마다, 좀 더 멋진 나를 기대해 본다. ‘간호사’이기 때문에 힘들기도 하겠지만 ‘간호사’라서 신나는 순간들을 통해 배워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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