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바다

홍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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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시간이 지나고
흙의 시간이 지나고
소복소복 쌓였던 눈의 시간이 녹아
강이 되어 흐르네
그대와 함께 미소 지으며
발을 담근 시간의 강은
빠르게 굽이치기도 하고
천천히 흐르기도 하네
이상도 해라
시간이 흘러든 바다에선
가져왔던 색깔들 모두 사라지고
환한 빛만 남네
자유롭기도 해라
나를 벗어던진 내가
시간의 바다에 들어
둥둥 떠다니다가
깊게 잠기기도 하네
참 편안하기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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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헌: 연세의대, 이비인후과 전문의.
문학청춘(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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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 돋아 꽃대 솟고 꽃 피더니 낙엽지고 열매 맺는 일련의 과정은 결과이며 또한 시작이다. 이토록 희게 쌓인 눈이 녹아 흘러 결국은 흐름이란 이름으로 어쩔 수 없이 시간처럼 그렇게 강이 되고 바다로 흘러 모이는 것 또한 과정이다. 태양이나 바람이 바다를 훑어 물기를 가져다가 오늘은 눈이 내린다.
강은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든 어떤 사연이 녹아 있든 강이라 불리고, 온갖 곡절(曲折)들이 한데 소금에 절여져 오래 오래 보관되어 질 수 있더라도 바다는 바다라 불린다. 지나치게 많은 사연들은 대개 조용하고 편안하다. 담겨진 각각의 빛깔들이 제 빛을 죽인 채 그저 바다빛으로 강물 빛으로 물빛으로 빛날뿐이다. 마치 노인의 주름살이 주름살로만 그려질 수 밖에 없는 것과 같다.
각각의 사연을 따져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 이외엔 모든 게 자유롭다. 시간의 바다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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