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

남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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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사랑이 그대 밑에 있고,

<사랑하오 그대를>
이렇게 써놓고 봐도그대가 사랑 밑에 있네.
그래서
<그대를 사랑하오>라고써 봤더니 또사랑이 그대 뒤에 있고,

<사랑하오 그대를>이라고써 봤더니, 역시그대가 사랑 뒤에 있네.
아아 그 누굴 사랑한다는 것
그건 애시당초
말이나 글로는
가당치 않다는 걸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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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만: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비뇨기과 전문의, 남재만 비뇨기과의원 원장.
시문학 등단(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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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순서가 있을까? 어느 이는 그 순서를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랑의 순서(The order of love): 인연으로 다가올 것 같은 예감 →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설렘 → 필연으로 만들겠다는 다짐 →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생각나는 그대.’ 순서라고 이름 붙였지만 그는 명사 또는 명사형으로 사랑의 과정을 정하고 있을 뿐이다. 또 어떤 이는 '사랑하기'가 '사랑받기'보다 먼저라고 순서를 매긴다. '진정한 사랑하기'는 아무런 목표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며 사랑의 순도(純度)를 진심의 강도(强度)로 갈라 순서를 피하고 있다.
‘그대’라는 단어도 ‘사랑’이라는 단어도 ‘한다’는 단어도 모두 글자의 개수로 따져 무게를 달 수 없이 얽히고 설켜 있어 실마리를 풀 수 없으니 순서를 정할 수가 없다. 당연히 ‘그대’라는 대상과 ‘사랑한다’는 행위의 순서를 정하는 일은 시인처럼 어차피 쉽지 않다. 그대가 구상인지 추상인지. 구상이라면 무엇인지 누구인지. 누구라면 생김새, 성품은.....
혹시 설익고 순도 낮은 ‘사랑 같은’ -‘사랑’이 아닌- 것은 희미하게라도 차례를 매길 수 있다. 이래서 ‘사랑하고’, 이만큼 사랑하려 하니 ‘그대가’ 그립고. 그러나 보이고 떠오르는 모든 만물(萬物)의 전후상하(前後上下) 전후좌우(前後左右)에 ‘그대’가 어른거리고 그 전후상하를 몽땅 사랑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쯤에선 이미 ‘사랑하는’이 ‘사랑’이고 ‘그대’가 바로 ‘사랑’이고 ‘그대를 사랑하는’이 ‘그대’가 되고 ‘사랑’이 되어버려 ‘사랑하는 나’와 ‘사랑하는 내’가 하나가 되어 한 하늘 한 구름 위에서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꿈을 짓고 있다.
그대를 사랑하오’는 ‘사랑하오 그대를’의 도치(倒置)가 전연 아니다. ‘그대를 사랑하오’는 ‘사랑한다는 것’ 그 자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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