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늘보

김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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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어간다 이것저것 구경한다 흥정한다 옷을 입어본다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서로 쳐다보며 웃어댄다 부딪치며
지나간다 유모차를 끌고 간다 전단지를 살핀다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올라간다 내려온다
그냥 흘러간다 뻐끔뻐끔 유영한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 뒷켠으로 밀려난 국도의
이정표는 희미해지고 구겨진 가드레일은 을씨년스럽다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는 언덕 밑 낡은 차 옆에서
허리 굽은 노파가 잡초를 뽑고 있다
폐쇄공포증 환자처럼 엘리베이터를 싫어하는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반대편에는
컨베이어를 탄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다
나무처럼 반듯이 서서
나는 나무늘보가 된다
나무늘보는 나무에서 거의 잠만 잔다지
신진대사율이 아주 낮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
가끔 눈만 껌벅거린다지
환경파괴로 서식지가 줄어들고 있다지
사람들이 부딪칠 것 같이 몰려다니고 있다
삶을 시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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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전남의대 졸업. 송도병원 부원장.
애지 등단(2006).

‘하루에 18시간 정도 나무 위에서 잠을 잔다. 후각은 잘 발달되어 있지만 청각은 둔하다. 지능은 낮은 편이다. 체온은 변온성(變溫性)이다. 야행성이며 나무의 새싹•잎•열매 등을 먹는다.’ 나무늘보에 대한 설명의 일부다.
남보다 서둘러야 살아 남는다고 한다. 뒤돌아보거나 옆을 바라 볼 틈이 나면 더 달려야 한다는 믿음으로 고속도로를 달린다. 달리면서 주변의 손상을 생각하는 일은 사치다.
1만년 전에서 160만년 전에 해당하는 홍적세(洪積世)에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했던 땅 위의 포유동물인 메가테리움(megatherium)이 나무 위로 올라간 게 나무늘보다. 분명 그 늘어진 삶은 멸종을 막아낸 가장 큰 원인일 게다. 나무에 달라붙어 꼼짝 않고 늘어져 털에 나무의 이끼가 끼고 자라 자연스레 천연 보호색에 덮이게 되어 좀처럼 들키지 않으니 날쌘 포식자들보다 더 오래 산다. 주변 자연 환경을 손대지 않고 놔두면 느릿느릿 환경이 내 몸에 닿고 들어와 내가 환경이 되어 눈만 껌벅거리며 살아도 삶은 멸하지 않는다. 삶이 속도이며 속도가 경쟁의 척도인 진료실 EMR(전자의무기록) 앞에서 느려지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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