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저 자ㅣ 오르한 파묵 (이난아 역)
ㅣ출판사ㅣ민음사
ㅣ발행일ㅣ2005.5.23
ㅣ페이지ㅣ332쪽

ㅣ정 가ㅣ

11,000원

| 출판사 서평 | 터키에서 출간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터키 소설사의 각종 기록을 경신하는 작가인 파묵이 『새로운 인생』(1994)으로 처음 서방 언론에 소개되었을 때, 《뉴욕 타임스》의 리뷰어들은 “동방에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라며 흥분했다. 1998년에 출간된 『내 이름은 빨강』은 영국과 미국 아마존 베스트를 석권하고 35개국에 번역 출간되며 그를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작가 대열에 올려놓았다. 이렇듯 문학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큰 성공을 거둔 파묵의 다음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모두가 궁금해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소설 인생 처음으로 이스탄불이 아닌 다른 곳, 터키 동북부의 국경 도시 카르스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를 구상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특성들, 지적인 플롯과 세련되고 독창적인 서사기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고난 작가들만이 갖는 이야기의 재능은 『눈』에서도 여전하며, 더불어 전작들에서 보인 바 없는 긴박감 넘치는 빠른 사건 전개와 시적인 문체(주인공 카는 시인이다.)가 독자들에게 소설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격랑 속 개인의 삶 박진감 있게 그려

김나영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 교수

오래 전 올림픽게임 중 유도 경기에서 터어키의 여자팀이 경기중 히잡 벗는 것을 거부하여 퇴장당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란 적이 있다.


주최측의 경기 중 위험한 사고가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규칙은 잘 이해가 되었지만 게임에 출전하기까지 무수한 고생을 했을 터인데도 퇴장을 당할 정도로 히잡 쓰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이후 2006년 54세의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의 작품, “내 이름은 빨강”과 “눈”을 읽게 되면서 히잡이 가진 의미를 알게 되었고 2012년 올림픽게임에서 반복된 퇴장 사건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5년 전 짧은 터어키 여행에서 매료된 터어키 문화의 유산, 그리고 6.25 한국전쟁에서 가장 먼저 파병하여 우리를 도와준 후 지금도 피를 나눈 민족으로 한국을 가깝게 여기는 터어키인들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형제애를 느끼고 있다.

이에 터어키의 대표적인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눈”이라는 장편소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카(Ka)”는 대학생 시절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독일로 망명한 후 12년간 시인으로 살다가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고향 터키로 돌아온다.

이후 소녀들의 자살 이유를 취재해달라는 신문사의 요청과 옛사랑 ‘이펙’을 찾아 국경의 작은 마을 카르스로 간 42세의 카는 폭설과 그 마을에서 발생한 혁명의 격랑에 휘말린다.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충돌 속에서, 현대화를 지향하는 케말주의자와 그에 저항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카르스 현지인과 대도시 이스탄불의 부르주아, 히잡을 벗느니 자살을 택하겠다는 여학생들과 교칙을 고수하려는 학교, 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테러리스트와 경찰, 군부와 언론, 쿠데타 세력과 민중, 사랑에 빠진 남과 여가 빚어내는 갈등과 반목이 숨막히게 전개된다.

이와 같은 소용돌이의 중앙에 위치하게 된 카는 눈에 덮인 도시에서 4년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던 시를 “저절로” 쓰게 되면서 행복하기만 하다. 단 3일 동안 그 많은 사건과 갈등이 두 권의 책에서 시적인 문체, 막힘 없는 지적 상상력으로 유려하면서도 빠르게 펼쳐지는 것이다.

또한 오르한 파묵은 메마르게 느껴질 수 있는 이념의 갈등을 큰 배경으로 사랑과 배반을 다룸으로써 소설의 흥미를 높여주고 있다.

즉 카는 옛사랑이었던 아름다운 ‘이펙’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작은 카르팔라스 호텔에 머물게 되는데, 이펙과 그의 여동생 ‘카디페’가 혁명가 ‘라지베르트’를 사랑하고 대립하면서 그 혁명가를 각자의 방식대로 지키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라지베르트의 은신처를 카가 경찰에 알려주면서 라지베르트는 처형당한다. 이러한 배반의 댓가로 카는 카르스를 탈출하여 다시 독일로 돌아가 이펙에게 사랑을 호소하지만 배신을 이유로 다시 거절당한다.

이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유도 모르는 채 카는 살해되고 카의 친구 오르한 파묵이 카르스에서의 카의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이 소설은 끝난다. 의사로서 관심을 가는 부분은 소녀들의 자살에 관한 것이었다.

카는 왜 이 가난하고 쇠락한 작은 도시에서 소녀들이 이상한 자살증후군에 걸렸는지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놀라운 것은 자살이 매우 일상생활과 자연스럽게 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식구들과 저녁을 아무 일 없듯이 들고 나서 조용히 자살을 하는 식이었다. 이는 경제적 문제, 소외, 노령화, 스트레스 그리고 우울증이 자살의 원인으로 보이는 우리 사회와는 다른 양상으로 보였다.

이러한 복합적 내용을 다루고 있는 오르한 파묵의 ‘눈’은 80년도에 입학하여 매우 빨리 진행되는 정치적 격동 상황에서 예과 1,2학년을 힘들게 보낸 나에게 위대한 작가가 다루면 이렇게도 힘든 역사가 한 개인의 일상에서 다채롭고 박진감 있게 진행될 수 있구나 라는 감탄을 자아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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