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1세의 노벨문학상

고행건, 중국 연극계 반향 일으켜… 영어 번역본만 30편

임어당, 중국 사회개혁에 공헌… 동·서양 가교역할 담당

한문은 몇 천년이전 중국선조가 창조한 경탄할 상징문자이며, 현재 중국인은 물론 한국인, 일본인이 애용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지적이고 학술적인 문자이다.

서구문화권에 잘 알려진 많은 중국작가들은 그들 선조의 우수한 언어감각 유전자를 타고났음인지, 모두가 기이(?)할 정도로 어학천재들이다.

그리하여 외국에 보급된 그들 작품들 대다수는 중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쓰였으니 서구권에서 시행되는 노벨문학상 심사에서도 아시아인 작품이 고역을 치루는 ‘언어와 문화의 벽’이라는 난관을 극복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중국태생 노벨문학상 수상자 고행건(高行健·왼쪽. Gao Xingjian. Gao라 약칭)과 유력한 후보였던 임어당(林語堂·오른쪽. Lin Yutang. Lin이라 약칭)을 먼저 소개한다.

다음 장부터는 외국어로 쓴 명작을 외부세계에 보급한바 있는 다음의 중국1세 작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괄호 안은 작품의 언어). 한수잉(韓素英. Han Suyin. 영어). 장룽(張戎. Chang Jung. 영어), 쳉녠(鄭念. Cheng Nien. 영어). 양일(楊逸. 일본어).

고행건

▲ 고행건
고행건
중국서 자란 펄벅(1938년도 노벨상수상자)의 수상작 ‘대지’가 중국을 소재로 한 것처럼 2000년도 수상작가 Gao의 작품소재도 자신의 조국 중국대륙이다.

그런데 크게 다른 점은 중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작가 펄벅 여사는 ‘대지’를 그녀의 모국어 영어로 쓴 반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Gao의 수상작 영산(靈山. Soul Mountain)과 ‘어떤 남자의 성경’(One Man’s Bible)은 중국어와 프랑스어(그 자신이 번역)로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

‘영산’은 암 선고를 받은 남자가 중국남부의 산야를 방황하는 모습을 그린 장편소설로서 1989년 파리에서 출간되었다. 1998년에 나온 ‘어떤 남자의 성경’은 자신이 직접 겪은 중국문화혁명시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소설이기도 하다.

Gao는 1940년 중국남부의 ‘강서성’에서 출생하여 북경외국어학교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어 번역가로 활동하는 한편, 극작가로서 여러 작품을 발표하여 중국연극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89년 천안문사건을 계기로 파리에 정치망명하여 1997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현재 파리에서 소설가 희극작가로 활약 중이며 화가로서도 인정받아 전시회를 갖기도 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프랑스어 또는 중국어로 쓰인 그의 다양한 저작물(소설 희극 화보 평론 등)중 영어로 번역되어 보급된 것 만해도 30종류나 된다.

망명 작가인 그의 작품은 중국본토에서 판매금지처분 됐으나, 인민일보는 2000년 그의 노벨수상뉴스를 보도했으며 근래엔 그의 일부작품이 간행되고 있다고 전한다.

임어당

▲ 임어당
임어당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에 오른바 있는 중국이 낳은 세계적작가인 Lin의 저작물을 읽은 분들이 많을 줄 믿는다.

Lin은 1895년 중국 복건성에서 목사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기독교가정환경에서 자라났으며, 상해의 크리스천스쿨인 ‘세인트-존스’대학을 졸업(1916년)한 후 북경청화대학 영어강사로 재직했다.

훗날 그가 회상한 것처럼 “미션스쿨에서 배웠기 때문에 중국국학을 경시(輕視)하게 되고, 중국고전에도 어두운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영어강사시절 북경의 고전서점가를 열심히 드나들면서 독학으로 중국문학과 고전지식을 익혔다고 말한다.

1919년 하버드대학의 장학금을 얻게 되어 결혼한 부인을 대동하고 미국 유학하여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그 후 독일의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여 1923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중국에 귀국했다.

귀국 후 북경대학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재야 언론인으로서 수구세력에 대항해서 중국의 사회개혁을 위해 날카로운 필봉을 발휘했고, 특히 영문잡지 ‘중국평론주보’와 ‘천하월간’지에 시사평론과 중국고전작품의 영어판발표에 힘썼다.

그에 주목한 ‘펄벅’여사(훗날 노벨수상자)의 권장에 따라 영어작품 ‘나의 고국 우리국민’(My Country and My People)을 집필하여 1935년 뉴욕에서 출판됐다.

이 책은 중국의 민족, 풍토, 사상, 문화, 철학, 역사를 서구세계에 알리는 내용으로서, 출판 후 곧 미국베스트셀러가 되어 미국사회에 문학가로서 그의 지위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1936년 그와 가족은 미국에 이주하게 되고, 그 후 1966년 자유중국 대만에 귀국할 때까지 30년간 외국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날 때부터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한 운명을 타고난 그는 중국에서 성공한 후 국제사회에서도 활약하는 길이 트였던 것이다.

기나긴 외국생활기간 중 3년간(1947~1950년)은 유네스코의 예술부장으로 파리생활을 했으며, 한때(1954년)나마 싱가포르에 신설된 남양(南洋)대학 총장직을 맡았으니, 동서의 가교역할을 하는 Lin이 동서를 연결하는 최고학부 총수로 군림했다고나 할까.

그 기간 외엔 미국뉴욕에 정착하여 집필활동에 전념했으며, 외국체재 30년간에 29권의 영어서적을 선보였으니, 거의 매년 1권씩 출판한 셈이며 그의 여러 저작물들은 미국에서 계속 베스트셀러가 되고 각국 말로 번역되어 세계에 보급되었다.

특히 1937년 출판된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은 미국서 40판 이상 출판을 거듭하는 롱-셀러가 되어 20세기 중반기의 세계 베스트셀러로 손꼽혔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구미사회의 높은 평가는 한때 노벨문학상의 가장유력한 후보로 거명됐으나, 2차대전 중 노벨상이 일시 중단됨으로서 애석하게도 수상기회를 놓쳤다고 전한다.

1966년 귀국이후 대만과 홍콩에 정착하여 1976년(81세) 사망할 때까지 10년간 그는 중국어로 많은 논평과 수필을 썼으며, ‘홍루몽’을 비롯한 많은 중국고전을 번역(영어)해서 해외에 출판소개하고 평소 그의 소원이던 당대한영사전(當代漢英辭典)을 완성했다.

그의 저작물은 모두 50권이나 되고, 현재 미국에서 그의 작품 총 29개와 그의 처와 딸 셋의 작품 14권이 판매되고 있다.

국제적 작가였던 ‘임어당’은 현재 서구사회에서 70대 이상의 노인지식층에게 가장 잘 알려진 아시아 작가라 할 수 있겠다.

이상과 같이 프랑스어로 글 쓰는 노벨상작가 고행건과 영어로 쓴 명작으로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한때 유력한 노벨상 후보였던 임어당을 소개했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