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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健康 돋보기 327]‘‘조선말 큰 사전’에서 ‘큰 사전’으로- 2

옛 사전에서 한국 현대사를 읽는다

▲ 김일훈 박사
在美 내과 전문의, 의사평론가

제3권부터 조선을 삭제한 책제목 변경은 6.25동란 이전의 좌•우익 대립상을 한눈에 읽는 듯한 착잡한 심경을 가눌 수 없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립던 고향은 아니더라”라는 노래 가락은 해방 후 외국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인 나의 우울했던 소년시대를 말함이었다. 해방된 조선땅에는 좌•우익의 극한 대립으로 이미 사상적 분단시대가 개막되었던 것이다. 학교, 직장, 이웃할 것 없이 좌익 아니면 우익으로 양분되고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면 회색분자나 기회주의자로 몰리기 일쑤였고 이웃이나 어린 학생 사이에도 인정이나 우정이 있기 전에 사상이 앞섰던 시대였다.

아침 학교조회 때도 애국가 봉창할 때면 한쪽에선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인민들이 보호하사…조선사람 조선으로…”했다. 이렇듯 대립과 분열로 얼룩진 나의 조국 땅에서 나의 소년시절은 우울하기만 했고 돌이켜 생각하면 암흑같은 시대였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좌익은 지하에 숨거나 아니면 이북으로 도망가고 또 이남의 일부 지성인들도 친일파와 모리배가 싫어서 월북해 갔으니 지성인의 고장인 조선어학회도 큰 충격과 변동이 없을 수 없었다.

이때 조선어학회 회장으로 존경받던 이극로 박사는 월북하고 남북협상회의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존재로 돌변하여 그후 인민공화국의 문화부장관이 되었다.
이남에서는 공교롭게도 이극로와 같은 고을(경남 의령)출신이자 그와는 호형호제하던 안호상 박사가 문교부장관이 되어 일민주의 반공교육에 앞장섰으며 우리는 학도호국단이란 군사조직체에서 훈련받던 일도 어제만 같다.
일이 이쯤 되니 잔류한 한글학자에게도 좌익적인 ‘조선말’이란 어휘를 쓰는 데 저항이나 압력이 있었겠고, 또 ‘한국말’사전이라 부르기엔 생소한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사 생략하고 제3권부터 ‘큰 사전’이라고 시침 뗐을 법하다.

제4, 5, 6권이 발행된 것은 7년 후인 1957년 이였으니 그사이 우리는 6.25를 겪고 나는 학교에 복귀하여 의대를 졸업하던 해이니 남한정부의 질서도 잡혔을 때였다.
이제 내 선친이 가신 지 30여년, 주인 잃은 ‘큰 사전’은 그후 어느 친지의 손을 거쳐 어느 대학도서관의 구석에서 잠자다가 우여곡절 끝에 바다를 건너 내 손에 들어왔다.
‘큰 사전’도 이젠 ‘옛 사전’의 가치밖에 없고 이용하는 일도 거의 없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소중한 골동품같이 간직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이 책<사진 1> 모습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책 껍질이 벗겨져 대머리진 데가 있고 또 얼룩진 흔적이 많음은 기쁨보다 슬픔이 많았던 우리 선친시대의 얼굴을 연상케 하며, 칠흑같이 검은 책 색깔은 내 어릴 때의 암흑시대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리고 책표지에 금색으로 박은 글자, 즉 ‘조선어학회’ ‘조선말 큰 사전’ ‘한글학회’ ‘큰 사전’ 등의 글자는 긴 세월의 풍화로 낡아져 가까이 자세히 보아야만 할 정도로 퇴색해 버렸다. 나에겐 이 희미한, 보일까 말까 하는 사라져 가는 글자가 더욱 뜻깊다. 그것은 마치 내 선친과 우리 조상들이 우리 자손들에게 “못난 조상시대를 잊어버려라” “과거를 생각지 말라”고 우리에게 타이르고 격려하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1957년 큰 사전 제4, 5, 6권을 발간한지 10년만인 1967년부터 한글학회는 순조롭지 못한 정부보조금을 받아 큰 사전 재편찬을 계속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1992년에 한글학회지음 ‘우리말 큰사전’<사진 2>이란 새 명칭으로 전 4권 5500쪽의 새로운 개정판발간을 보게 되었다.
해방직후 ‘조선말 큰 사전’으로 시작하여 좌우대립의 혼란기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사상통일이 되면서 ‘큰사전’으로 변천하고, 1990년대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전하면서 ‘우리말 큰 사전’으로 마무리됐으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2001년 가을 백두산 답사를 마치고서 북한의 선봉지구를 구경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그곳 기념품으로 ‘사회과학연구원’에서 1992년 발간한 ‘조선말 대사전’<사진 3>을 구입해왔다.

큰 부피 2권으로 된 총 4150쪽의 사전이며 엷은 종이에 아주 작은 글자로 조밀하게 제본되어 있어, 총 활자수와 어휘숫자로 따지면 남한의 ‘우리말 큰사전’보다 더 크다고 짐작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 사상과 관련된 어휘가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혁명’과 관련된 어휘는 ‘혁명가’ ‘혁명가극’ ‘혁명가요’ 등에서 시작하여, ‘혁명학설 ‘혁명화’ ‘혁명 활동’ 등까지 무려 180개가 되어 5쪽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각 조목마다 장황한 설명을 가하고, 이들 어휘가 포함된 ‘김정일 발언’이나 ‘김일성 저작집’의 글을 한결같이 인용했다.

참고삼아 남한의 국어대사전에 실린 ‘혁명’과 관련 어휘는 ‘혁명가’ ‘혁명당’ ‘혁명문학’ ‘혁명재판’ 등 4개뿐인데도 말이다. 이렇듯 학문까지도 공산당 도구로서의 가치만을 인정을 하는 집단이 있다는 자체가 우리겨레의 비극이다.

<사진 1> 해방후 발간한 ‘조선말 큰 사전’과 ‘큰사전’ 전6권.

<사진 2> 1992년 새로 발간한 우리말 큰사전(왼쪽)과 제1권의 표지.

<사진 3> 북한서 발간한 조선말대사전(왼쪽)과 제1권의 표지.

곽수연 기자  yeon8045@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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