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의대증원 2000명으로 촉발돼 12월 비상계엄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던 의정갈등이 1년 6개월째 계속되고 있지만, 최근들어 의료정상화를 위한 의정간 대화 분위기속에서 빠른 변화를 맞고있다.
지난 6월 정권교체로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고, 7월 의사 출신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의정 신뢰회복’이 전면에 부상했으며, 의대생 복귀 선언과 전공의의 수련병원 복귀 움직임 등 실질적인 갈등봉합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신뢰 회복이 즉각 ‘행복한 엔딩’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뢰는 본격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로, 본격적인 ‘의료정상화’는 출발선에 서지도 못 한 것이다.
의정사태는 단순한 사회적 충돌을 넘어, 현행 의료제도의 근본적 문제를 드러낸 만큼, 이번 정책 재설계가 향후 의료계 뿐 아니라 국민 건강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의학신문은 의료계에 당면한 과제를 살펴보는 한편, 전공의·의대생부터 의대교수, 의료기관까지 의정사태의 의료계 당사자들로부터 '뉴노멀(New Normal)'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담았다.
<글 싣는 순서>
①출구 보이는 의정사태, 남은 과제는?
숫자로 본 ‘의정사태 1년 6개월’
②현실에 막힌 젊은 의사들, 미래는?
③의정사태 또다른 주인공, 의대교수들이 바라본 숙제들
④공공성강화, 달라지는 의대병원 생존전략
⑤개원가가 맞이할 새로운 의료환경은?
⑥의-정 '폭삭속았수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의학신문·일간보사=김현기 기자] 의대증원 사태로 촉발된 1년 반의 의정갈등은 이제 봉합 국면에 들어서는 듯 보인다. 의대생·전공의 복귀 선언, 의사 출신 보건복지부 장관 취임,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 재개는 분명 ‘변화’의 조짐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진정세 속에 여전히 남은 상처와 불신은 묵직하다.
이번 사태에 따라 의료현장에서 버텨온 젊은 의사들과 교수진, 개원가, 그리고 환자들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상처를 입었다. 정부의 정책 추진 방식, 의료계 내부의 대응, 국민들의 피로감은 교차하며 ‘누구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 갈등의 역사’를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신뢰를 회복하고 새로운 제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지난 1년 반의 고통은 아무 의미 없는 소모전으로 끝날 것이다. 정부와 의료계 모두 ‘책임 있는 파트너십’을 통해 의료 정상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움직여야 한다.
의학신문은 각 기자별로 이번 의정사태가 남긴 의미를 현장에서 돌아보고, 각 영역에서 필요한 변화와 과제를 짚어본다.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앞으로 의료계가 나아가야 할 ‘뉴노멀’을 향한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피해자’가 ‘책임자’가 돼야하는 ‘아이러니’
의정사태 1년 반, 무모했던 책임자들은 사라지고 피해자들이 남은 부채의 지분만 떠안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이 이번 사태의 최종 피해자라면, 의대증원 2000명, 필수의료패키지 강행으로 인한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는 전공의를 비롯한 의료계이다.
사직 전공의는 아직 절반 수준으로 복귀중이고, 대학병원에서도 죄책감과 피로 속에 의대교수들도 버티지 못하고 현장을 떠나고 있다.
정책 실무자들 역시 윤석열 전 대통령을 비롯한 ‘진짜 책임자’들은 무모한 정책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조용히 현장을 떠난 상황에서 산더미처럼 넘어 남아 있는 현안 과제를 두고 책임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의료대란을 지켜보면 최근에 안타까웠던 수해 현장이 오버랩된다. 사람들은 참담한 마음 속에서도 필요한 살림살이를 챙겨 수습하고 일상회복을 위한 삶으로 돌아간다.
인재(人災)라는 큰 차이가 있지만, ‘윤석열표 의료대란’이 한바탕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 (불행 중 다행으로 싹튼) 의정대화를 계기로 전공의 환경 개선, 의료인력추계 등 건져낼 정책들을 보완해 올바른 방향으로 추진되기를 바라본다.
대학병원 ‘버티기 싸움’, 이대로 방치한다면
“정부가 공공성을 요구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지원과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의정사태를 두고 대학병원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려오는 말이다. 교육·연구·중증 진료라는 세 축을 동시에 떠안고도, 병원 스스로는 공공성과 수익성 사이의 간극을 메울 방법이 없다.
교수들이 당직을 전담하며 연구실을 비우고, 강의실은 전공의와 학생 부재로 공허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복귀하라’는 명령만 내렸다.
지난해 대통령이 계엄령이라는 시대착오적 폭주로 민주주의를 위협했다면, 의료현장에서는 ‘수가 정상화 없는 공공성 강화’라는 방식으로 대학병원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
병원이 자구책을 찾으려 해도 길은 막혀 있다. 비영리법인이라는 틀 때문에 수익사업은 금지돼 있고, 결국 비급여 진료 확대 같은 우회로밖에 선택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조차 국민 반발과 의료 불평등 심화를 낳을 뿐이다.
전공의 복귀가 논의되고 있지만, 수련병원은 이제 전공의들을 노동력이 아닌 ‘피교육자’로 대우해야 하는 과제를 마주했다. 교육비용은 눈덩이처럼 늘고, 인건비는 감당이 안 된다.
‘미국·유럽처럼 국가가 직접 수련비용을 지원해야 한다’는 교수들의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정부가 내놓은 응급의료 가산 확대, 전공의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은 시작일 뿐, 구조적 해법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사업도 마찬가지다. 적합 질환군이라는 잣대는 만성질환 진료와 지방 대학병원의 세부 전공을 무너뜨린다. 교수들은 ‘지역 진료와 인력 양성이 동시에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정부의 답은 여전히 ‘체계 전환’이라는 말뿐이다.
민주주의가 대통령 탄핵으로 지켜졌듯, 이제 의료민주주의도 되찾아야 한다. 대학병원의 생존은 곧 국민 의료의 생존과 직결된다. 정부가 거버넌스를 통해 의료계와 소통하고, 수가 정상화·수련비용 지원·진료지원 인력 제도화를 책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병원의 미래는 ‘버티기 싸움’으로 전락하고, 국민은 무너진 필수의료 앞에서 또다시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 몰랑 빼애액”...무관심이 낳은 장기화
지난 윤석열 정부의 의대정원 확대 정책은 결국 1년 반이라는 긴 의료사태를 낳았다. 그 사이 의대생은 학업을 멈췄고, 전공의는 수련병원을 떠났으며, 환자들은 불안과 불편 속에 병원을 찾았다. 정부와 의료계는 각자의 명분을 내세우며 협상 테이블을 붙였다 떼기를 반복했다.
최근 들어 의대생과 전공의들의 복귀 분위기가 감지되면서 표면상 ‘진정’이라는 단어가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정말 모두가 이 사태를 책임 있게 안고 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정책을 던져놓고도 정작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사실상 방관했고, 의료계는 후배 의사들을 앞세우면서도 국민을 향한 설득에는 부족했다. 국민 역시 ‘나랑 직접 상관없다’는 듯 피로감에 무뎌지며 이 긴 소동을 바라봤다.
결국 이번 사태는 다 같이 힘들었지만, ‘아 몰랑 빼애액’ 수준으로 다 같이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반면교사할 수 있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사회적 갈등은 어느 한 쪽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책임을 나눠지고 관심을 가져야 풀린다는 것.
책임을 미루고 방관한 채 ‘언젠가 알아서 해결되겠지’라는 태도로는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가 남긴 진짜 숙제는 바로 이 ‘공동의 책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또다시 비슷한 충돌이 찾아올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갈등을 외면하지 않고 불편하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책임을 나누려는 태도다.
결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고, 위기를 넘는 길은 남이 아닌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을 이번 사태는 다시 확인시켜줬다.
정부·의료계의 유연성 결여로 촉발된 아쉬운 결말
의사는 단순한 직업인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자리다. 경제적 보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따를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의정 갈등은 불가피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의료계의 입장은 분명하지만, 그 안에는 ‘사명감 없이 버틸 수 없는 직업’이라는 현실이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사 개인의 헌신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제도와 환경은 그 사명감이 지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돼야 한다.
특히 이번 의정 사태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유연함의 부재였다. ‘강대강 충돌’은 하나가 뿌러져야 끝나기 마련. 그런데 이번 갈등은 마치 하나가 부러질 듯 보였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논쟁은 시작부터 날 선 대립으로 전개됐다. 정부는 의료 인력 확충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고, 의료계는 교육 여건 악화와 의료 질 하락을 우려하며 집단행동으로 맞섰다.
이후 정부의 정책 추진은 규정 속도를 위반했고, 의료계는 단속카메라를 설치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 가운데 국민은 의료 공백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다시 이런 갈등이 불거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의료 인력 확충, 지역 격차 해소 등 다양한 현안들은 아직도 해결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부와 의료계는 마주 보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나란히 서서 국민을 바라보고 소통하길 바란다.
특히 정부는 숫자와 제도 개편만 고집할 것이 아닌 질적 향상을 담보할 교육·수련 체계 강화에 힘쓰고, 의료계 역시 ‘기득권 지키기’라는 프레임에서 해방되기 위해 국민에게 다가갈 방안을 고민할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