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기 ‘간납사 표준계약서’ 더 미룰 수 없다

의료기기 유통 투명성 강화-부당한 요구 사전 차단-중간 유통비용 줄여 환자 부담 경감 기대

[의학신문·일간보사]

이진휴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부회장
이진휴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부회장

2020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의료기기 대리점의 공정한 거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의료기기업종 표준대리점 거래계약서’를 마련했다. 이 계약서는 유통구조 내에서 비교적 약자인 대리점과 판매업자가 일방적 계약해지나 부당한 반품 요구 등으로부터 일정 부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이 계약서를 도입함으로써 계약 안정성을 확보하고, 거래 투명성을 높이는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그러나 의료기기 유통 생태계의 모든 불공정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공급망 내에서 시장 논리를 무시하고 ‘갑’의 위치를 고수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병원과 공급업체 사이에 위치한 ‘간납사’다. 간납사는 법적 분류상 일반 대리점이나 판매업자로 등록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병원으로부터 독점적 납품 권한을 위임받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중소 간납사는 지분구조상 식별이 어렵고, 실질은 ‘병원이 지정한 통행세 업체’로 기능한다.

이들의 주된 목적은 병원의 수익 증대다. 병원은 간납사를 통해 의료기기를 저가에 구매하고, 건강보험에는 상한금액에 근접한 수준으로 수가를 청구함으로써 그 차액을 간납사 또는 내부 이익 구조로 흡수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해 왔다. 실거래가 상환제가 유도한 건강보험 재정 절감 효과가 유통 구조에서 왜곡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국민 세금이 유통 중간 단계에서 과도하게 소모되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간납사는 공급업체에 수수료를 지속적으로 인상하고 ‘가납’ 제도를 악용해 재고 손실 책임도 회피하고 있다. 또한, 세금계산서 발행만으로 이윤을 취하며 거래 질서를 왜곡하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이에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는 간납사의 불공정 관행을 지적해 오며, 일부 개선과 실태조사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여전히 현장에서는 불공정이 만연하며, 건보재정 누수 문제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협회는 간납사와 공급업체 간 불공정한 거래 관행을 개선하고 이를 제도화하기 위한 ‘의료기기업종 표준 거래계약서(이하 ’간납사 표준계약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계약서는 간납사의 불공정 행위를 구조적으로 시정하기 위한 중단기 전략이다.

간납사 표준계약서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첫째, 의료기기 유통과 계약의 투명성을 강화한다. 간납사와의 거래 조건을 명문화함으로써 분쟁 발생 가능성을 줄이고, 공급업체의 법적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둘째, 부당한 수수료, 납품가 인하 요구, 재고 부담 전가 등을 사전에 차단해 공급업체의 경영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셋째, 중간 유통 비용을 줄이면 결과적으로 건강보험 재정의 낭비를 방지하고 환자 부담을 경감할 수 있다.

물론 정부 주도의 계약서 도입이 시장 자율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의료기기 유통 시장은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불공정이 방치되는 구조이므로, 지금은 불공정 이윤 편취를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다. 유통 생태계를 정상화하지 않는다면 환자 부담은 더 커지고, 건보재정의 누수는 심화될 것이다.

간납사 문제의 근본에는 치료재료 실거래가 상환제도 있다. 병원에 가격 조정 유인이 없다면, 결국 그 부담은 국민에게 전가된다.

이제는 간납사 표준계약서를 제도화해야 할 시점이다. 환자의 부담을 줄이고, 건강보험 재정을 지키며, 의료기기 시장의 공정성을 확립하기 위해 간납사 표준계약서 제정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이진휴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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