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천근만근 몸이 피곤하고, 물먹은 샌드백처럼 축 늘어진 기분으로 진료를 보는 때가 있다.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무슨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생각지도 못한 채, 흐리멍텅한 정신으로 진료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내가 진료를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리에 앉아 가을들판의 허수아비처럼 환자분의 얘기나 들어주는 척하고, 그 자리에서 차팅이나 하고, 약속처방대로 약이나 주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체성을 헷갈려할 때가 있다. 아니 아주 자주 그런다. 병원선에서 하루 종일 지내다 보면,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다. 의사가 되어 진료보는 일을 소명의식을 갖고 감사하게 여기며 일하는 날은 1년 중에서 며칠 안 되는 것 같다.

어느 날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진료를 받던 할머니 한 분이 진료가 끝난 후 갑작스럽게 나에게 한마디 하셨다. “원장님, 사람이 차갑게 보여.”(섬 할머니 중에는 가끔 원장님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제법 계신다.) 할머니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섬에서 할머니들께 소화제, 감기약, 파스, 후시딘 같은 상비약들만 드리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라고 자체 진단을 내렸다.

나는 나 자신을 굉장히 친절하고 현명하고 훌륭한 의사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속으로 거만하게 폼이나 재면서 속으로는 ‘나 잘났다’ 병에 빠져 살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도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며 매일을 참회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된 의사의 덕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선진화된 의료 지식, 수준 높은 수술 실력, 집도한 수술횟수, 유명한 병원 출신, 논문 게재건수, 미국의 유명의대 연수 등이 전부일까? 갑자기 위의 덕목들이 모든 의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병원에 있는 교수 말고는 대부분의 의사들은 개원을 하거나, 2차 병원에서 경환을 위주로 진료를 보며 살아간다. 그 자리에 있는 의사들에게 최신 의료지식, 까다롭고 복잡한 수술실력, 진료실적이나 수술집도횟수가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부분의 의사들이 공감할 것이다. 매일 비슷비슷한 질환으로 약속처방을 내며, 똑같은 내용의 설명을 환자에게 매번 연거푸 내뱉으며, 진료업무가 더 이상 재미없고 하루하루가 비슷한 다람쥐 쳇바퀴처럼 느껴져 매너리즘에 빠져 사는 의사 선후배 얘기를 많이 들어왔다.
나는 위에서 나열된 항목들보다 의사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 무엇일까 고심해보았다. 친절, 배려, 경청, 세심함, 연민, 공감, 미소, 인간미, 융통성 등등…. 생각해 놓고 보니 어떠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식이나 기술, 집도한 수술횟수, 병원출신 등의 외부적인 덕목들이 아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들이었다.

현재 의사로서의 나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식도 아니고, 수술경험도 아니고, 수술 실력도 아니다. 어느 대학 어느 병원 출신인지는 더더욱 중요치 않다. 물론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내가 1차 진료를 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핵심적인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재미를 잃고, 매너리즘에 빠져 하루하루를 재미없이, 기계처럼 무미건조하게 사는 의사 선후배와 이문제 대해서 같이 의논해 보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자를 대하는 자기자신 안에 있는 내면의 덕목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항상 잊고 사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반복적이고, 비슷비슷한 진료업무 속에서, 매일 매일을 신나고 재미있게 따뜻하게 보내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들로 보내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단순한 진리들을 하루하루 새롭게 되뇌이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나는 어떤 의사로 살아가는지 어떤 의사로 기억되고 싶은지 매순간 물어보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오늘도 묻는다. 나는 어떤 의사인가?

/ 엄 재 두 (경상남도청 공중보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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