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명이비인후과의원장

우리나라에 현대의학이 도입된 후 의료는 환자와 의사사이의 양자 관계로 의료비가 직접 지불되고 있었다. 높은 의료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의 접근성을 떨어뜨렸다.

박정희 정권 당시 북한보다 뒤쳐진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자 정치적 목적으로 강제 의료보험을 도입하게 되었다. 1977년 의료보험이 강제 도입된 후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으로 확대 되어 환자와 의료공급자 사이에 의료보험공단이라는 제3자가 개입하게 된다.

하지만 제대로 된 보험재정 확보가 어려운 경제적 여건 하에서 강제로 밀어붙인 제도이기에 피보험자나 공급자 어느 한 그룹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 힘들었다. 한 마디로 정의로운 의료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보장성 강화'라는 목표아래 가짓수는 늘려가고 있지만 싸구려 뷔페의 음식처럼 제대로 된 보장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적은 재정으로 구색을 맞추어 운영하려다 보니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수가 책정을 못 하고 있다. 치료 재료대가 저가 제품의 기준에 맞추어져 있고, 의료행위비가 저수가로 책정되어 있다. 당연히 환자들은 질적 보장성이 취약한 의료행위를 제공받고 있다. 심지어 치료나 수술에 필요한 자재나 재료를 환자가 자기 돈으로 사서 써야 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급자들에게는 평균 물가 인상률에도 못 미치는 수가인상을 하고 있어 의료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필수적인 진료과(외과, 산부인과 등)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하지 않게 되자 이들 과들에 지원하는 의사들이 줄어들게 되어 문을 닫게 되는 극한 상황까지 왔다.

대한민국에서 정의로운 의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근본적으로 안정된 보험 재정을 확보 없이는 어떤 것도 해결될 수 없다. 재정안정화를 위해 재정중립이라는 틀을 고수하려는 저수가정책과 관리의료를 통한 진료억제 정책은 한계에 다 달았다. 문제의 해결방법을 바꾸어 볼 때가 됐다.

정부가 나서서 문제 해결을 해야 한다. 그동안 의사들에게만 너무나 무거운 도덕적 짐을 지우고 규제해 왔는데, 이제는 정부가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할 때가 왔다. 국민들에게 보험료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우리나라의 경우는 기본적인 자원이 적기 때문에 건보재정이 증가할수록 우리나라 의료는 더 정의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국회에서 개념있는 의원입법들이 발의되고 있다. 정의로운 의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보험재정의 안정적 확보가 담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부지원금을 해당 연도 보험료 예상 수입의 최대 19%까지 지원해야 한다는 법안들이 나오고 있다.

의사들도 수가인상에 목을 매기보다는 국민들을 위한 양적 보장성뿐 아니라 질적 보장성 확보를 위해 보험재정의 정부지원금을 늘리라고 국회의원들과 힘을 합해야 할 것이다. 재정이 커야 국민에게 보다 폭넓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가계약에 있어서도 이번 2012년 정기국회에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의 정의롭지 못한 인적구성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인적구성이 정의롭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절차적인 행위를 거친 것이라면 정의로운 계약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정한 인적구성과 절차적 정의를 지킨 계약결과에 대해서는 그 결과가 만족스럽든 불만스럽든지 간에 받아들이는 것이 정의로운 행위이다.

하지만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제도 하에서 만들어진 결과를 강요하거나 결과를 받아들이라고 겁박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적 행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하에서 만들어진 각종 위원회의 행태와 무엇이 다른지 해명을 듣고 싶다. 역지사지로 위원회에 참여한 그룹과 입장을 바꾸어 놓았을 때 어떤 생각과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정의로운 의료가 이루어지도록 정의롭지 못한 건정심 구성같은 모순된 제도는 고치고, 안정된 보험재정 확보를 위해 정부가 움직일 시기이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