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발전 속도에 맞는 합리적 규제와 신뢰 기반 거버넌스 필요”
“AI 오진·데이터 편향 등 새 리스크, 사회적 대응체계 시급”
위험 등급별 단계적 허용·실증사업 중심 정책 전환 등 제언
[의학신문·일간보사=이재원 기자] 인공지능(AI), 재생의료, 유전체 분석이 의료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리스크 우려와 사회적 신뢰의 부재가 여전히 혁신의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대해 김강립 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혁신의 성패는 이를 안전하고 투명하게 수용할 수 있는 협력적 거버넌스 등 ‘신뢰 기반의 제도 설계’에 달려 있다고 제언했다.
11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보건의료 미래리스크 정책포럼: 보건의료 피지컬 인공지능의 미래 방향’에서 김강립 전 식품의약품안전처장(현 김·장 법률사무소 고문)은 ‘신기술의 적정한 활용을 위한 리스크 관리 정책 방향’을 주제로 발표하며 “AI, 재생의료, 유전체 기반 정밀의료는 질병의 예측·진단·치료 전 과정을 혁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는 전례 없는 고령화와 고착화된 저성장에 직면해 있다”며 “보건의료 분야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유일한 해법은 기술 혁신이며, AI와 재생의료, 유전체 분석이 한국의 미래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전 처장은 의료현장에서 이미 AI가 진단의 정밀도와 효율성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메이요클리닉의 AI 영상판독 시스템은 유방암 진단 정확도를 88%에서 94%로 높였으며, 국내 AI 영상의료 시장 규모도 2,000억 원을 넘어섰다. 재생의료 분야에서는 줄기세포 치료 임상 승인 건수가 150건을 돌파했고, 유전체 기반 암 치료는 환자의 5년 생존율을 20% 향상시킨 것으로 보고됐다.
김 전 처장은 “AI와 로봇, 장치가 결합된 ‘피지컬 AI’는 진단과 치료의 정밀도를 끌어올리는 기술”이라며 그는 “의료데이터와 인공지능의 결합은 신약개발, 맞춤치료, 질병 예측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김 전 처장은 “혁신의 이면에는 사회적·법적 리스크가 공존한다”고 경고했다. 구체적으로 ▲AI의 의사결정 불투명성(블랙박스 문제) ▲데이터 편향으로 인한 진단 격차 ▲AI 오진 시 책임 주체 불분명 ▲비허가 재생의료 시술 부작용 ▲유전체 정보 유출에 따른 가족 단위 피해 등을 구체적 리스크로 제시했다.
김 전 처장은 “AI 오진의 경우 의료진, 병원, 개발사 간 책임소재가 명확하지 않으며, 유전체 정보 유출은 단순한 개인정보 침해를 넘어 고용·보험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보 비대칭 상황에서 소비자 보호장치가 부재한 점도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김 전 처장은 해외 주요국이 이미 기술 혁신과 안전성 확보의 균형을 위한 규제체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EU는 2024년 제정된 ‘AI Act’에서 의료 분야를 최고위험군으로 분류해 투명성·책임성 요건을 강화했고, GDPR을 통해 유전자 및 생체정보 활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미국은 FDA가 AI 의료기기 사전심사와 사후 모니터링 체계를 강화했으며, 일본은 ‘재생의료안전확보법’과 AI 윤리가이드라인을 통해 설명가능성과 환자동의 절차를 명문화했다.
김 전 처장은 “해외의 공통된 접근은 위험 기반 등급제와 투명성 확보, 그리고 국민 권익 보호에 있다”며 “우리도 경쟁국 수준의 규제 틀을 갖추지 못하면 기술 도입이 늦어질 뿐 아니라 글로벌 의료산업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 전 처장은 “우리는 여전히 ‘위험하니까 하지 말자’는 태도에 머물러 있다”며 “위험 등급별로 관리 수준을 달리하고, 일정 수준의 위험은 실증사업을 통해 검증하는 점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제주도나 강원도처럼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을 중심으로 AI 진료, 재생의료, 유전체 분석 기술을 시범적으로 적용하고, 검증 결과를 바탕으로 제도 전환을 추진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라고 제안했다.
김 전 처장은 “기술의 혁신성과 불확실성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혁신을 저해하지 않되 안전성과 신뢰를 확보하는 균형적 리스크 관리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혁신은 결국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며 “AI·재생의료·유전체 기술이 의료혁신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정부, 산업계, 연구기관, 의료계가 함께 참여하는 협력적 거버넌스가 필수”라고 말했다.
김 전 처장은 “미국·유럽·일본처럼 위험 기반의 합리적 규제 환경을 조성하고,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기술을 제도화하는 것이 한국 의료혁신의 출발점”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