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준 씨엠병원 내과 / 시인, 수필가

유형준 강남성심병원 내과 교수
유형준 씨엠병원 내과 / 시인, 수필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선거철로 접어들고 있다. 다양한 주장이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바야흐로 넘치고 있다. 말초 자극용 비문(非文), 섬뜩한 상스러움, 비석에나 새길 광물성 언어…. 잠시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을 떠올린다.

스무 살 밀은 우울했다. 철학자인 아버지 제임스 밀은 자신의 친구인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 원칙에 따라 어린 아들을 훈련시켰었다. 밀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모든 인간 행동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증진을 목표로 해야 한다.”라는 제레미 벤담의 추종자가 되었다. 밀은 공리주의 협회를 설립하고, 대중 평론에 기사를 내고, 벤담의 힘든 원고를 편집하는 등, 이 원칙을 발전시키는 데 젊은 시절의 활력을 바쳤다. 그러던 스무 살 무렵, ‘즐겁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에 빠진다. 쾌락적 결과의 총량만으로 세상이 행복하다니.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면, 그 다수에 끼지 못한 소수의 행복은? 양적 공리주의로는 행복한 세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을, 밀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인생의 모든 목표가 실현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이 큰 기쁨과 행복이 될까?’ 억제할 수 없는 자의식이 단호히 답했다. ‘아니!’ 이에 내 마음이 내려앉고, 내 삶의 기초가 다 무너졌다.”

최종 경쟁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평온해졌을 때에, 불만이나 지루함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행복을 찾고 있었다. 삶에 대한 희망과 목적을 줄 수 있는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불가능하다’는 귀결에 닿자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밀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이때 밀을 구출한 것은 다름 아닌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송가(頌歌): 어린 시절의 추억을 통한 불멸의 암시」였다. 워즈워스의 시가 밀을 어떻게 치유하였을까? 밀은 자서전 『내 정신력의 위기. 한 단계 전진』에서 고백했다.

“워즈워스의 시가 내 마음 상태를 치유하는 약이 된 것은, 그 시가 단순한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설렘 속에서, 감정 상태와 감정에 의해 채색된 생각의 상태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시는 내가 찾고 있던 감정의 경작(耕作) 자체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속에서 모든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내면의 기쁨, 동정적, 상상적 즐거움의 원천을 끌어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투쟁이나 불완전성과 무관하고, 인류의 신체적, 사회적 조건이 향상될 때마다,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그들에게서, 나는 인생의 더 큰 악이 모두 제거될 때, 영원한 행복의 원천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 같았다. 워즈워스는 인간의 공통된 감정과 운명을 외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나를 가르쳤다. 고요한 묵상 속에 참되고 영원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시는 그의 우울한 기분을 북돋워 삶에 대한 무한한 열정으로 채워주었다. 워즈워스를 읽으며 발견한 대답은, 아름다움에 감동받을 수 있는 능력, 즉 거대한 투쟁뿐만 아니라, 섬세한 감정, 광경, 소리, 조용한 묵상에서 기쁨을 누리는 능력에 기대는 것이었다. 이 능력을 밀은 ‘느끼는 능력’이라고 표현했다. 워즈워스의 시를 통해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느꼈다. 시는 그에게 즐거움, 특히 예술이 자아내는 미적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과는 매우 다른 즐거움이었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밀은 ‘적절한 계산’에 의한 무자비한 측정으론 전연 헤아릴 수 없는 도덕적 가치를 개념화했다. 즐거움의 양과 질을 구별하여, 드디어 이른 바 질적 공리주의를 제창했다.

‘권력 또는 다수의 폭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킬 수 있을까?’에서 출발하여, ‘어찌해야 개인의 자유가 공동의 귀한 가치가 될까?’로 공리의 질을 헤아린 밀의 자유론. 그의 자유론에 가장 힘을 보태는 칸트의 말이 있다. “네 의지의 격률(格率)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 의지의 격률은 내가 지금 따르려는 도덕규범이고, 보편적 입법원리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할 도덕규범이다. 물론 누구나 아집과 편견과 무지와 탐욕 등의 부정적 정서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래서 밀은 이렇게 강조했다.

“보다 온전한 자유를 누리려면 구성원들의 지적 역량이 성숙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육과 토론의 민주적 과정이 필요하다.”

‘성숙한 지적 역량을 지닌 사람’을 밀의 다른 언어로 이르면,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을 갖춘 사람’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모든 지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인간의 마음만큼 불멸하는 것은 시”라던 워즈워스의 믿음이 밀의 자유론을 자유케했다. 사위(四圍)의 어지러운 광물성 언어 속에, 「송가」의 끝 부분을 본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사람의 마음 덕분에,/ 그 마음의 부드러움, 기쁨, 두려움 덕분에,/ 보잘것없는 꽃 한 송이가 내게 줄 수 있는/ 종종 너무 심오해서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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