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대 박인숙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의학신문·일간보사] 지금 의대 정원 확대와 의대 신설 이슈가 블랙홀처럼 다른 민생 이슈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의사들이 의대 정원 확대와 의대 신설을 결사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이런 정책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입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의사들이 당장 받게 되는 큰 불이익은 없다. 다시 말해서 의사들의 ‘밥그릇싸움’이 아니라는 말이다.

필수의료 붕괴, 지방의료 붕괴로 촉발된 성급한 의대정원 확대 발표가 오히려 이런 현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아이로니한 상황이 벌이지고 있다. 의대 정원이 큰 폭으로 늘어나고 의대가 마구 신설된다고 해도 지금 현장에 있는 의사들은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증원된 학생들이 의사가 되어 사회로 배출되는 시기가 빨라야 10년 후부터이기 때문이다.

진짜 심각한 점은 이런 설익은 정부정책이 이미 살얼음을 걷듯 아슬아슬하게 지탱되고 있는 필수의료, 지방의료를 더욱 빠르게 붕괴시키는 방아쇠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정부 발표 이후 일어나는 우려 스러운 현상 하나를 소개한다. 10년 후부터 엄청난 숫자의 의사들이 시장에 배출될 때 벌어질 치열한 경쟁에 대비하여 지금 수련 중이거나 수련을 막 끝낸 젊은 의사들이 수련을 포기하고 조기 개업을 서두르고 있다. 게다가 아예 수련을 받지 않고 의대 졸업 후 곧바로 개업현장에 뛰어드는 젊은 의사들도 급증하고 있다. 이 결과 그렇지않아도 모자란 전공의 수가 더욱 부족해져서 대학병원들, 특히 비수도권 대학병원들이 큰 어려움에 처해있다. 그러면서 필수의료 지원자는 더욱 줄고 있다.
또한 37개월이 넘는 긴 복무기간을 피하기 위해 지금 18개월 짜리 사병복무를 지원하는 의사들도 증가하고 있어서 가뜩이나 모자란 군의관 수가 더욱 부족해지고 있다.

새로운 정책을 펴기도 전에 이해 당사자들이 대책을 마련하는 모양새이다.

어떠한 고생도 무릅쓰고 오로지 생명을 지키려는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진료, 수술에 임했던 과거의 필수과 의사들과는 매우 다른, 지금의 대부분 MZ세대 의사들에게 워라벨을 무시하며 희생을 강요하는 관행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학원가에서는 의대 정원이 1천명 증원되면 이공계 인재 수천명이 ‘의대 낭인’이 될 것이다. 한 해의 서울대 신입생 전원이 사라지는 것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건국이후 우리나라를 눈부시게 발전시키고 지탱해 왔던 주 산업은 모두 이공계 인사들의 노력과 헌신 덕분이었다. 그런데 매년 수 만명에 달하는 이공계 지망생들이 의대로만 쏠린다면 우리나라 산업은 어떻게 지탱되고 이 나라의 앞날은 어떤 모습이 될 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의료는 서비스 산업이며 국가의 기간산업이 아니다. 국내 유수 이공계 대학이 의대 낙오자들로 채워지거나 입학생이 미달된다면 국가 산업 발전은 누가 이룰 것인가?
이미 학원가가 뜨겁게 반응하고 있고 멀쩡히 직장에 다니던 젊은 이들이 의대 입시에 뛰어들고 있다.

출산율이 급감하면서 한 해 출생아 숫자가 20만명 대로 떨어졌고 조만간 20만명도 깨질 것이다. 그런데 의대 정원이 4천명이 넘는다면 해마다 태어나는 신생아의 2% 이상이 의사가 된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경우는 없다.

극도의 저출산에 너도나도 의사만 하려는 나라는그냥 망할 것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더 이상의 의대 정원 확대 논란을 중단해야 한다. 정부는 이런 망국적인 정책을 당장 접고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정책들을 펼쳐야 한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정부는 그냥 실천만 하면 된다.

애초에 의대정원 확충 주장이 나온 배경이 필수의료 붕괴와 지방의료 붕괴인데 의대 정원 확대와 의대 신설은 그 해결방법이 아니다.

우선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소위 ‘바이탈 과’ 의사들이 등 떠 밀려서 정든 진료현장을 떠나지 않도록 막는 정책들을 펼치면 된다. 방법은 간단하다. 아래 두 가지만 고치면 당장 비 필수 인기과로 이탈하는 바이탈과 의사들을 붙잡을 수 있다.
원가에도 한참 못 미치는 필수의료 수가를 선진국 수준으로 획기적으로 올리고, 사법 리스크를 줄여주면 된다.
의료분쟁 특례법을 모든 임상과에 적용하고 일부 국가들처럼 불가항력 의료분쟁 피해보상금을 국가가 책임지면 된다. 이 두 기본 정책들이 바뀌지 않는 한 대한민국 필수의료는 더 빠르게 붕괴할 것이다.

지방의료 붕괴도 심각하다. 지방 병원이 비어가면서 환자도 없고 의사도 없다. 이대로 간다면 모든 지방 환자들이 수도권으로 와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처방은 ①수도권 병상 증상을 막고 ②일차의료 전달체계를 재정비하고 ③선택과 집중 정책을 펼쳐서 지역별 필수의료 집중 센터를 만들고 ④환자 이송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이에는 무엇보다 비수도권 지방자치 단체장, 선출직, 관료의 확고한 의지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들부터 솔선수범해서 지방의료기관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과 가족은 모두 서울 의료기관을 이용하면서 지역 주민들은 수도권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태도이다.

전국에 깔린 세계 최고의 교통망과 정보통신망, 그리고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나의 건강, 나의 가족 만은 대한민국 ‘최고’에게 치료받겠다는 심리를 자극하며 소위 ‘명의’ (사실 명의라는 개념도 매우 모호하다)를 집중 부각시킴으로써 지방환자들의 수도권 쏠림을 유도하는 듯한 언론도 많다. 이래서는 비수도권 환자들의 수도권 쏠림을 막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그런 와중에 지역 정치인들은 자신과 가족들은 수도권 병원을 이용한다. 아무리 지방에 병원을 잘 지어도 ‘지도층’이 이용하지 않고 모두 수도권의 ‘명의’에게 진료받겠다고 우긴다면 지방의료 붕괴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 지역주민을 무시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의대 정원 확충도 반대하지만 의대 신설은 더욱 막아야 한다. 전국 각 지역의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자기 지역에 의대 신설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집 앞마당에 의대가 들어선다고 지역 주민의 의료서비스가 좋아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정치인들은 의대 신설이 만병통치 인양 선전하면서 국민을 희망고문하고 있다. 이런 정치인들이 10년 후 정작 자신이나 가족이 아프면 자기 지역에 유치한 신생 의대병원에서 치료받는지 지켜볼 일이다.

한번 만든 의대를 없애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 의대가 40개인데 서남의대 폐교에 20년도 더 걸렸다. 좁은 국토에 전국이 일일생활권인 나라에 의대가 40개나 되고 각 의대에 모든 전공분야의 전문가가 2~3명 씩 포진해서 모든 응급상황에 대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일이다. 어느 나라도 그런 것이 가능한 나라는 없다.

의대 정원 확대와 의대 신설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대한민국 발전을 해치는 아주 나쁜 정책이다. 의사들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정책의 직접 피해는 국민이 입을 것이다.
국민을 위해서, 국가발전을 위해서 의대 정원 확대와 의대 신설을 멈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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