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80)

유형준 의사 문인 열전

[의학신문·일간보사]

그의 일생을, 어느 평론가는, 다채로운 삶이라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보면, ‘여러 종류나 형태가 한데 어우러져 다양하고 호화스럽다’라는 뜻의 형용사는 아무래도 군색하다. 한 사람의 삶을 한두 단어 속에 통째로 가두는 거침새를 무릅쓰고 굳이 일러야 한다면, 신산한 다채랄까?

유기수(柳基洙, 1924년~2007년)는 정읍에서 태어났다. 태인보통학교, 1941년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말기의 회오리는 그를 곧 세찬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만주 주둔 관동군 군의관으로 차출되었다.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산부인과에 재직하던 중,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 역시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인민군으로 징발되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 뒤이어, 유엔군의 참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인민군이었던 그는 죄수가 되었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자, 국군 군의관으로 소집되어 중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人間橋梁』 초간본(1966년 발간) 표지와 유기수
『人間橋梁』 초간본(1966년 발간) 표지와 유기수

6.25 전쟁 후, 전주로 돌아가 '유기수 산부인과의원'을 개원하면서 문학에 침잠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유림일(柳林一)'이란 필명을 사용했다. 첫 번째 문력(文歷)으로 ‘1968년 신춘문예(京鄕新聞경향신문)《好老博士호로박사》로 데뷔’를 기재한 것으로 보아, 신춘문예 공모를 기점으로 작가로서의 본격적 결심을 다졌던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단편소설 「호로박사」는 장편으로 개작되어, 1977년 한 달간 《전북신문》에 연재되었다. 1989년에는 소설 『작은 뻐꾸기』로 제1회 풍남문학상(지금의 전주시 예술상)을 수상했다.

더러 국내 첫 의사작가 또는 의사문인라고 언급한 기록들이 있으나, 정확한 기술은 아니다. 이미 본 연재 2021년 10월 26일 자 의사문인열전(38) ‘무심(無心)의 인간주의 – 의사 문인 김대봉’에서 의사 시인 김대봉(金大鳳, 1908~1943)이 국내 최초 문인임을 발굴, 게재한 바 있다. 따라서 적확하게 이른다면, ‘국내 최초의 의사 소설가’라 칭할 수 있겠다.

신산했던 자신의 곡절을 고백한 『人間橋梁인간교량』(초간 1966년, 삼화출판사)은 실제 체험기에 가까운 반(半)소설로,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파고에 휩쓸린 두 의대생 친구의 삶을 반추했다. 이어서 6.25 당시 치열한 전투와 함께 민족의 비극 그 자체인 지리산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한 『지리산에 핀 꽃은 시들지 않는다 1, 2』(2000년)를 비롯하여, 『지리산 사람들』, 『빨치산』, 『북에서 온 기러기』, 『벽소령 가는 길』, 『두만강 7백 리』 등을 냈다.

유기수 산부인과 원장 유기수는 개원의로서 유복한 생을 살았다. 의사협회 등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의사보다는 작가로서 기억되길 바랐던 그는, 1990년에 병원을 접고, 병원 건물에 ‘탐진출판사’를 설립하여 자신의 책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출간했다. 더불어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전라북도지부의 이사, 표현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문학단체 활동도 꾸준히 했다.

체험 속의 응어리를 녹여 빚은 유기수 문학 작품의 주제이며 동시에 신념은, 자신도 밝혔듯이, 통일지향이었다. 타의에 의해 조립되어 버린 자신의 운명을 삭혀내어 남북분단의 극복을 위한 지리산의 화해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량인 휴머니즘을 강조하였다. 특히 지리산의 화해만이 남북 화해와 민족 조국 통일의 관건이라고 믿었다. 신념은 문학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 실천으로 표출되었다. 민족통일문학회의 회장 등을 맡아 통일 지향 문학 행동에 매진하면서, 북한동포돕기운동 전북본부에 전주 시내 중심지의 사무실을 무상으로 내주기도 했다.

집필 내내 메마른 질문 하나 맴돈다. “고황에 옹이로 박힌 역사의 곡절은, 작가 스스로 휴머니즘이라 부른 다리 위에서 화해로 풀어지는가?” 『인간교량』(1994년 간행본)에 실린 작가 후기 첫머리에 시선이 멎어선다. “역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다시 말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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