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53·끝>

[의학신문·일간보사]

「 미술, 문화로 읽다 」 연재를 마치며…

2018년 10월 1일자 ‘의학신문’에 이 연재 첫 번째 글 ‘「미술, 문화로 읽다」를 연재하며’를 다시 읽어 봤다. 호기롭게도 글 말미에 난해하다는 현대미술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미술을 문화의 한 단면으로, 그러니까 ‘사람들이 만들어온 수많은 무늬(人文) 중 하나’로 풀어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초심은 어디로 갖는지 모르겠고, 상투적인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한마디로 ‘과부하가 걸려서 완전히 방전된 배터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지난 5년간의 한국 미술계를 돌이켜 보니 수년 전 국가 브랜드로 채택한 ‘다이내믹 코리아’처럼 역시 역동적이었다.

‘「미술, 문화로 읽다」를 연재하며’에서 여러 사실을 열거했다. 가장 먼저 거론한 것이 사기죄로 기소된 조영남 대작사건 재판이었다. 1심에서 유죄, 2심에서는 무죄 판결이 나서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였다. 연재 중이던 2020년 6월 25일 대법원의 기각 판결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리고 2018년 서울옥션 제25회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의 ‘붉은 점화’(원제: 3-Ⅱ-72 #220)가 우리 돈으로 85억원에 낙찰되며, 초미의 관심은 그의 작품이 언제 100억원을 넘느냐는 것이 되었다. 그러고는 바로 이듬해 11월 크리스티 홍콩경매에서 ‘우주’가 수수료를 포함한 경매비용을 제외하고 약 131억 8750만원에 낙찰되며 실현되었다.

아트 부산 (아트페어 전경)
아트 부산 (아트페어 전경)

더불어 작품가와 관련해서 2006년 처음으로 은행이 갤러리와 함께 아트펀드 상품을 출시하며 본격적으로 미술 작품이 재테크 투자 상품이 되었음을 살펴봤다. 2022년 한국 미술시장 규모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1조원 시대에 진입했다. 이제는 인터넷에서 특정 작품을 공동구매할 수 있는 사이트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기 지분만큼 소유하고 언제든지 지분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다. 이제 미술작품은 자산시장에서 주목받는 투자 상품이 되었다. 언론은 무엇보다도 MZ세대 컬렉터의 증가를 주목하고 있다.

한국 미술시장 규모 1조원 시대 진입

위에 열거한 사례들 가운데 필자는 조영남 대작 사건의 대법원판결을 주목했다. 1심과 2심의 엇갈린 판결로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는데, 판결문에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 미술저작물의 창작 행위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실제 누가 저작자인지 다투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저작물을 창작한 사람을 저작자라고 할 때 그 창작 행위는 ‘사실 행위’이므로 누가 저작물을 창작하였는지는 기본적으로 사실인정의 문제이다.

그러나 창작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복수의 사람이 관여되어 있는 경우에 어느 과정에 어느 정도 관여하여야 창작적인 표현 형식에 기여한 자로서 저작자로 인정되는지는 법적 평가의 문제이다. 이는 미술저작물의 작성에 관여한 복수의 사람이 공동저작자인지 또는 작가와 조수의 관계에 있는지, 아니면 저작 명의인과 대작(代作) 화가의 관계에 있는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술저작물을 창작과정에서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이 어느 단계에서 어떤 형태와 방법으로 외부에 나타났다고 볼 것인지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본래 이를 따지는 일은 비평과 담론으로 다루어야 할 미학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관한 논란은 미학적인 평가 또는 작가에 대한 윤리적 평가에 관한 문제로 보아 예술 영역에서의 비평과 담론을 통해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고, 이에 대한 사법 판단은 그 논란이 법적 분쟁으로 비화하여 저작권 문제가 정면으로 쟁점이 된 경우로 제한되어야 한다. …”

법원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판결의 핵심은 “법원은 미술작품의 가치평가 등은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법자제 원칙을 지켜야 함”을 확인한 점이다. 이 판결문을 보면서 21년 전 월드컵 4강 신화에 흠뻑 취해있던 가을 모 일간지에 디종 컨소시엄 디렉터가 게재한 「“한 해 비엔날레 3건 개최할 역량 있는가” 프랑스 ‘디종 컨소시엄’ 디렉터 ‘한국 미술계에 고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떠올랐다.

“… 컨템포러리 아트는 민감한 문제다. 핵물리학이나 유전공학만큼이나 세련되고 록 콘서트만큼 열정적인 분야다. 단, 제대로 풀어냈을 때만 그렇다. 내용 없고 가식적인 비디오 작품, 유치한 컴퓨터 그래픽, 충격적인 설치미술만으로 가득 찬 비엔날레를 돌아보다 지친 관객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 회사가 모터쇼에 온 관객을 존중하듯, 미술 관객들도 존중받아야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지난 광주 비엔날레의 관객 감소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 해에 국제 비엔날레가 3개나 열린다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 싶다. 비엔날레가 열릴 때마다 국제적 관심이 쏟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국이 연간 3건의 비엔날레를 개최할 역량이 되는가. 새로운 미술관을 속속 세우면서 컬렉션 경쟁을 벌일 여건이 되는가. 창의력 넘치는 젊은 세대가 성장할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는가. 세계 미술계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중인가. 한국에서 열린 3개의 비엔날레를 둘러보며 든 생각이다.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변이 기다려진다.”

당시 이 글을 읽으며 벽안의 필자가 한국미술계에 고언을 하고 있음에도, 반추하기보다는 먼저 심한 모멸감이 들었다.

그리고 근 20년이 지나서 한국미술계는 앞서 살펴본 대법원판결을 받았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동안 한국미술계가 몸집만 커졌다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이는 미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연재 모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미술도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여러 무늬 중 하나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미술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다. 이런 관점에서 조영남 대작 사건을 바라보면, 이 사건은 조영남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할 수 없다.

미술, 작가·평론가·컬렉터가 끄는 마차

미술계는 작가, 평론가(미술 언론), 컬렉터(관객, 미술시장)라는 세 마리 말이 끄는 마차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적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삼두마차만이 최고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세 마리 말은 별개가 아니라 ‘원팀’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미술작품은 상품이 되었으며, 주요 소비자는 고액 자산가들이다. 여기서 왜곡된 모든 현상이 비롯된다.

미술 작품은 매우 특이한 상품이다. 무엇보다도 희소성에서 비롯되는 과시적인 소비재다. 예를 들어, 내 집 거실에 김환기의 ‘우주’가 걸려있다면 내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상상해보라. 작년에 ‘우주’가 일반에게 공개 전시되었다. 그때 많은 관람객이 어떤 마음으로 전시장을 찾았을까? 김환기의 작품 ‘우주’보다는, 130억짜리 그림을 보러 가지는 않았을까? 또한 미술품은 여느 골동품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더군다나 다른 자산에 비해 양도차익에 대한 세 부담이 현격히 적어 자산가에게는 절세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투자 상품이다. 인터넷에서 ‘미술품 투자’로 검색해보면 생산된 기사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에게 물어보고 싶다.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은 뭐니?” 아마도 “많은 사람이 나를 봐줬으면 좋겠어!”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그런데 몇 해 전 어느 화랑 대표가 고가의 작품이 매매되면, 작품은 화랑 수장고에 그대로 보관하면서 서류상 소유권만 이전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림은 자신의 이런 처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5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의학신문에 ‘미술, 문화로 읽다’를 연재해 준 김종영미술관 박춘호 학예실장님께 감사드린다. 총 53회에 걸친 미술칼럼을 통해 신문 독자들이 미술세계 흐름을 파악하고, 미술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접해 앞으로 미술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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