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력 거버넌스 구축 후 정원 논의 바람직

한희철 대한민국의학한림원 부원장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이사장
한희철 대한민국의학한림원 부원장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이사장

[의학신문·일간보사] 한희철 대한민국의학한림원 부원장 /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이사장

문명의 흥망성쇠가 자연조건이나 사회적 조건 등에서 비롯한 외부적 도전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성장 혹은 발육정지 등의 여러 양상을 낳을 수 있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개념은 인류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찾아볼 수 있다.

같은 논리로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고령화·저출산과 같은 사회적 도전에 직면하여 우리는 어떠한 전략을 가지고 응전함으로써 국민의 건강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모두가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여야 할 때이다.

해결책을 마련함에 있어 지속가능한 정책수립을 위해서는 강제성보다는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는 5개년 발전계획을 세워서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있지만, 보건의료에 대하여는 아직도 보건의료 발전계획이 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획이 없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해결책을 찾는 데 급급하다 보니 발전방향을 정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보건의료도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는데 이를 최대한 예측하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현실이다. 여기에서 논하는 모든 문제들을 한데 모아서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하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미래사회의 도전= 미래 의료환경 변화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변화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우리 사회는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미래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고령화는 사회적 여건이 좋아지고 의학이 발전함으로써 수명이 증가함에 따른 것이며, 저출산은 사회적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외에 요즘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필수의료 부족, 의료 지역격차, 커뮤니티 케어 등의 문제가 추가적인 미래사회의 도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의료인력을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해야 할지에 대하여 몇 가지 사항을 논하고자 한다. 중요한 점은 의료인력 관리 및 활용 과정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의사양성과정에 대한 관심과 특히 필수의료 인력양성 및 의사과학자의 양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태계 조성에도 정부와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깊숙이 관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의대정원 문제= 미래 의료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사회적으로 의대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의사의 수를 늘리기만 하면 이러한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인가? 이에 대한 의료계의 걱정을 사회에서는 밥그릇 지키기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사회적 의료상황 변화에 필요한 의사의 적정수를 계산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수요와 공급의 면만 보자면 고령화로 인한 의료수요는 분명히 늘어날 것이지만, 저출산으로 인한 의료수요는 줄어들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하나의 요소만으로 의사의 적정수를 산출할 수는 없으며, 많은 요소가 영향을 미치므로 상시 모니터링을 통하여 주된 요인들을 찾아내고, 미리 대비를 하여야 하는데,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년(군 복무를 포함하면 13년) 이상의 교육기간이 필요하므로 의대입시를 고려하면 15년 전에 의대입학정원을 산정하여야 한다. 즉 증원하든 감원을 하든 모든 경우에서 원하는 시점의 15년 전에 계획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시 모니터링을 하면서 매년 계획을 수정할 준비를 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본격적인 논의도 못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의료인력에 대한 거버넌스를 먼저 구축한 후에 그곳에서 모든 요소들을 검토하며 탄력적으로 의대정원의 증원 혹은 감원을 결정하여야 한다.

의료계, 정치계 그리고 사회가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소모적 논쟁을 중단하고, 정부에서 전문가를 중심으로 의료인력수급에 대한 거버넌스를 담당할 상설 위원회를 만들고, 이를 통해 모든 문제를 풀어갈 해법을 찾아 결론을 내리도록 해야 하며, 그 결론에 따라 탄력적으로 정원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의대정원 문제의 해결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필수의료 문제= 필수의료는 국민건강 수호를 위해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전통적으로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를 전공하는 의사가 중심이 되어 필수의료를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의사들이 필수의료 전공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는 워라밸을 중시하는 세대의 특징과 전공선택의 자유로 인하여 필수의료 전공을 강요할 수 없다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더군다나 필수의료 시행 중 발생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의사를 구속하였던 사회적 분위기가 더욱 필수의료 전공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필수의료가 중요하다면 그것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당 의사들을 사회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 결과 사명감을 가지고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사들이 결과에 대한 불안감으로 주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또한 사회가 의료계에 가하는 심각한 도전이며 의료계는 결국 위축된 응전을 한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전과 응전의 결과가 발전적이지 못하게 된다.

이에 대비하여 의과대학에서는 질병만을 가르치던 교과과정에 더하여 보건의료시스템과학(HSS)을 교육함으로써 의사의 관점을 환자의 질병에만 국한하지 않고 환자의 모든 면을 살필 수 있도록 교육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의사들이 질병뿐만 아니라 사회를 더욱 이해하고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현재의 보건의료 문제점들을 의사들이 먼저 고치려고 노력할 때가 올 것으로 기대하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좋은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고려되어야 할 또 다른 요소는 의사들의 세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회가 그러하듯이 요즘 세대는 워라밸을 중시하므로 새로이 양성되는 의사에게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근무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언론에서 연봉 4억을 주어도 의사를 구할 수 없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이는 단순히 의사부족 만으로 발생하는 현상은 아니며, 그 뒤에 숨어있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따라서 필수의료의 문제는 사회의 적극적 동참 속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이 걱정없이 마음껏 진료할 수 있는 근무환경조성이 최우선 과제이다. 그러므로 필수의료에 전념하는 의사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보호할지에 대한 해답을 정부와 사회가 먼저 만들어가야 한다.

◇의사의 양성과정= 우리나라에서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해서 의사면허를 받아 의사가 된다. 의과대학 교육과정은 기초의학 및 임상의학 강의를 통해 질병에 대한 의학의 원리를 배우고 이를 임상실습을 통하여 확인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 들어 질병뿐만 아니라 환자가 처한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보건의료시스템과학(HSS) 과정과 전문직종간협업(IPE) 교육을 추가할 준비를 하고 있다.

기초의학은 인체와 질병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배우는 의학 공부의 출발점이며 의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와 현재까지 밝혀진 의학적 이론을 공부한다. 이 과정 중에서 의학연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질병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방법을 찾는 연구과정을 직간접적으로 공부한다.

이어서 의학적 사실들을 환자를 접하면서 직접 확인하는 임상실습이 이어지는데 이 과정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임상실습과정에서 환자는 최고의 선생님이지만 프라이버시 문제로 임상실습하는 의대생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질병상태를 노출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학생실습을 넘어서 전공의교육에서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좋은 의사를 만들 수 있을까?

환자들이야말로 좋은 의사를 만드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최고의 선생님이기에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좋은 의사는 환자분들이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국민의 건강을 위하여 모든 국민이 의과대학과 함께 좋은 의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란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의학을 배우고 의사면허를 받지만 바로 환자를 진료하기에는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일본의 경우 의사면허를 취득 후에 바로 개원가에서 환자를 보는 개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즉 환자를 혼자서 진료하는 개업을 하기 위해서는 면허취득 후 2년간의 의무적 임상수련을 통하여 수련병원에서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배우게 한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과정을 국민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판단했기에 여기에 소요되는 예산을 모두 정부가 제공한다. 이로써 정부, 의사, 국민이 모두 국민건강수호를 위한 안전장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전문의가 되기 위한 전공의 과정에 드는 예산조차도 정부가 부담하고 있는데 이는 국민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실력있는 좋은 의사를 양성할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의사의 양성과정보다는 양성된 의사들의 관리와 활용에만 정책의 초점을 맞추어 왔다. 이제 우리나라도 공공의 성격을 가진 의료를 위해 의사양성과정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투자와 참여가 필요한 시점이다. 반도체 인력이 필요하면 정부와 기업이 대학과 계약학과를 통해 전액 지원을 하며 인력을 키우듯이 사회가 요구하는 의사인력 양성과정에도 이러한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40개의 의과대학이 있으므로 새로운 의과대학을 만드는 노력보다는 기존 의과대학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좋은 의사를 양성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양성되는 의사들도 이러한 환경이 만들어지면 국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체득하게 될 것이다. 투자 없이 결과를 얻으려 하는 것은 도둑심보이다.

◇의사과학자 문제= 최근 들어 우리사회는 코로나19 감염병 팬데믹을 경험하며 질병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비록 잘 극복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하고 있다. 이처럼 질병과의 전쟁은 의학적 전략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의학연구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는데, 정체를 모르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간신히 백신을 만들면서 방어가 가능해졌다. 이로써 우리 사회는 의학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득하게 되었으며 의학연구를 담당할 의사과학자의 양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질병과의 전쟁에서 과학으로서의 의학이 중요하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질병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의학연구를 통해 전략무기를 만드는 의사들과 이를 환자에게 적용하는 의사들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어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 우리사회는 의사는 환자를 진료하는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인지하여 오다가 비로소 연구하는 의사가 필요함을 이제 절감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의 의사과학자는 의학이 도입된 이후로 계속 존재하였으나 사회가 그들의 역할에 무관심하여 적절한 연구환경을 제공하지 못함으로써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에 의학연구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꾸준한 투자를 해온 미국을 포함한 의료선진국들이 역시 이번 코로나 19와의 전쟁에서도 결정적인 전략무기를 생산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질병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의학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의학이 많이 발전하였지만,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에게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라는 말밖에는 해줄 수가 없는 경우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의학연구는 미래를 위해 꼭 지켜나가야 할 영역이다. 그러나 의학연구는 의사들의 열정만으로 유지할 수는 없으며 반드시 정부와 사회의 적극적 투자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국립보건원(NIH)은 정부의 막강한 투자 위에서 세계 의학연구를 선도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도 NIH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정부 기관이 없어 의학연구의 사령탑이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벨생리의학상을 논하며 의학연구를 열심히 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필자는 그동안 의료계 활동을 해오면서 우리 정부와 사회는 의료와 의학연구의 차이점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의료수준이 높으니 의학연구 수준도 높으리라는 것은 큰 착각이다. 의료의 특성상 의학연구를 통해 얻는 것을 모두 공유하다 보니 fast follower의 경우 수준 높은 의료가 가능하지만, 결코 first mover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정부와 사회가 바라는 의학연구 및 산업화를 통한 국부창출은 first mover가 되지 않고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학연구를 의료와 분리하여 별도로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고민해야 한다.

의사과학자로 평생을 살아온 필자가 느끼기에 우리나라 의학연구는 의료와 과학 사이에 중간 어디쯤 위치하면서 어느 쪽에서도 분명하게 꼭 붙잡지 못하여 공중에 떠 있는듯한 매우 불안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정부는 의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인정하고 의학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요즘 사회에서 요구하는 의사과학자의 양성도 중요하지만, 양성 후 그들이 겪게 될 생태계의 안정성이 지속가능한 의학연구를 위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NIH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의학연구의 총사령탑인 AMED(Japan Agency for Medical Research and Development)를 출범시키면서 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국립의학연구원(가칭) 같은 의학연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총사령탑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미래 의료환경 변화에 따른 의료인력의 양성, 관리 및 활용은 진료를 중심으로 한 의료와 과학으로서의 의학연구 그리고 이들의 중심에 서 있는 의사들이 각자 맡은 분야에서 소신껏 진료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조성을 통해 이룰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국민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밝은 미래 의료환경을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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