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58)

유형준 의사 문인 열전

[의학신문·일간보사]

안토니우 아고스티뉴 네투(Antonio Agostinho Neto, 1922~1979)는 당시 포르투갈령이던 앙골라의 이콜로 에 벵고(Icolo e Bengo)에서 감리교 목사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 있는 살바도르 코레이아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후, 경쟁을 통해 앙골라 보건 및 위생 관리 위원회에 들어가 근무하였다.

스물다섯 살에 포르투갈 중부 내륙의 코임브라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가, 미국감리교의 장학금 지원으로 리스본 대학으로 옮겨 의학을 전공하였다. 이즈음 앙골라 민족주의 언론과 처음으로 접촉하면서, 혁명적인 시집을 출판하고, 아프리카의 고유문화를 재발견하기 위한 민족문화 운동에 가담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친화력과 적응력이 뛰어난 그는 아프리카 출신 학생들과 빠르게 친분을 쌓아 즉시 혁명적 학생 운동에 참여했고, 식민주의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민족주의적 반식민주의적 선동 때문에 수년 동안 여러 차례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반식민지운동은 즉시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국제앰네스티는 네투를 ‘올해의 죄수’로 선정했다. 서른다섯 살에 출옥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어 일 년 후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네토(왼쪽 위/아래: 청년 시절/해방 투쟁 중, 오른쪽: 집필 중)<br>(출처, 퍼블릭 도메인, 아고스티뉴 네토 박사 기념관 인터넷 사이트)
네토(왼쪽 위/아래: 청년 시절/해방 투쟁 중, 오른쪽: 집필 중)
(출처, 퍼블릭 도메인, 아고스티뉴 네토 박사 기념관 인터넷 사이트)

서른일곱 살에 고국으로 돌아와 고향에서 개원하여, 곧 명망과 인기를 얻었다. 이듬해, 식민 당국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진료 중이던 네투는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되었다. 환자들이 체포에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해 서른 명이 죽고 이백여 명이 다쳤다. 바로 ‘이콜로 에 벵고 대학살’이다.

서아프리카 연안의 외딴섬 카보 베르데에 구금된 지 이태 후, 1962년 모로코로 탈출, 그곳에 망명해 있던 앙골라 해방 운동 지도자들과 합류, 앙골라 대중 해방 운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앙골라에는 포르투갈과 맞서 싸운 세 개의 다른 민족주의 그룹이 서로 대립하여, 앙골라는 몇 년 동안 전투, 파괴, 정치적 경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족 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대중 해방운동은 비록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앙골라 국가 예산을 조달하는 서방 석유 회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975년 앙골라는 쉰세 살의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 독립을 달성했다.

평생 글 쓸 시간을 찾았던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시와 소설로 아프리카 아시아 작가회의 로터스 상을 비롯한 문학상을 받았다. 특히 재능을 타고났다는 그의 시는 『포르투갈 흑인 시선집』(1958년)을 비롯해 포르투갈과 앙골라의 여러 평론지에 발표되었다. 『거룩한 희망』(1974년)에 실린 시 「우리는 돌아올 거야」의 일부를 감상한다.

“<전략> // 커피로 붉고 / 목화로 희고 / 옥수수밭으로 푸른 / 우리 땅으로 / 우리는 돌아올 거야 // <중략> // 우리의 강, 우리의 호수 / 우리의 산, 우리의 숲으로 / 우린 돌아올 거야 // 물렘바 나무 그늘로 / 우리의 전통으로 / 리듬과 모닥불로 / 우리는 돌아올 거야 // 마림바*키상지*로 / 우리 카니발로 / 우리는 돌아올 거야 // 우리의 아름다운 조국 앙골라로 / 우리의 땅, 우리의 어머니 / 우리는 돌아올 거야 // 우리는 돌아올 거야 / 해방된 앙골라로 / 독립한 앙골라로”

시는 잃어버린 아들, 망명자, 독립운동가의 귀환과 고국, 사랑하는 사람으로의 귀환, 자유로의 귀환, 가난과 전쟁의 종식, 그리고 그들의 자원을 그들에게 되돌려주기를 절규한다. 날카로우면서도 영감을 주는 그의 글 속엔 반식민지 열정과 함께 자유를 향한 선명한 비전과 사랑이 간절하다. 평자들은 “그 간절은 아프리카 대륙의 해방 역사에 결코 지워지지않는 흔적으로 남았다.”라고 말한다.

대통령 네투는 1979년 9월,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췌장암 수술 중 쉰일곱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운명했다. 사후에 앙골라 최대의 공립대학인 앙골라 대학은 이름을 ‘아고스티뉴 네투 대학’으로 바꾸어 ‘현대 앙골라의 아버지’를 기리고 있다. 또한 그의 생일은 국가 영웅의 날로 국가 기념 공휴일이다.

* 악기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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