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호<br>의료윤리연구회 회장<br>&lt;명이비인후과 원장&gt;<br>
문지호
의료윤리연구회 회장
<명이비인후과 원장>

[의학신문·일간보사] 지난 글에서는 226월 발의된 일명 조력존엄사법의 문제점을 논했다. 이번 글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환자가 죽음으로 고통을 해결해달라고 호소한다고 하여도 의료인은 안락사나 조력자살을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나누고자 한다.

안락사인 조력자살법안을 반대하는 이유

첫째, 죽음은 나 혼자의 권리가 아니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내가 어디서 살고 무슨 일은 하든지 선택하는 것이 권리이듯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가족과 이웃은 물론 동료나 담당 의료진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자살을 택하면 자신의 인생만을 마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남은 가족들의 인생에 평생 깊은 상처를 준다. 가족으로서 누릴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 반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응어리를 풀고 떠나는 죽음은 남은 이들에게 선물이 된다. 유한한 삶에 대한 겸손함과 지혜를 배울 수 있게 한다. 인간 생명이 시작할 때 스스로 권리를 부여할 수 없듯이 생명을 스스로 끝낼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 자연사할 때까지 적절한 돌봄을 받으며 죽음을맞이하는 것이 존엄한 인간의 권리다.

둘째, 안락사는 그 대상의 범위를 한정 지을 수 없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명제는 극심한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이 선한 일이고,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중요한 권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락사 대상의 선정에 있어서 이 명제는 틀렸다.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선한 일이라면 육체적 고통에만 적용할 이유가 없다. 정신적 고통이나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의 자기결정권도 인정해야만 한다. 또한 고통을 해결하는 선한 일을 하면서 단지 자기의사를 표현 못한다는 이유로 중증 치매노인이나 식물인간상태, 불치병에 걸린 영유아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 의사표현을 못해도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좋은 행위이니 이들 또한 안락사 대상이 되고 만다. 이것이 안락사 허용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셋째, 말기 환자가 고통 때문에 죽고 싶다고 말할 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아무리 자기결정권으로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해도 이면에는 다른 뜻이 있다. 가족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에 대한 부담, 사회적으로 의미 없는 인생은 죽는 것이 낫다는 압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법안이 마련되어 병원에서 안락사를 강요하는 분위기라면 살고 싶다는 진실을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의미 없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정작 본인은 가족들의 삶을 하루라도 더 보고 사랑의 관계 속에 돌봄을 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심이다.

넷째, 안락사 법안은 생명을 끝까지 보존하려는 의사들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의사들은 오직 환자의 생명과 그들의 치료를 위해 존재한다. 고통을 없앤다는 목표가 아무리 명확해도 환자를 죽이는 일에 의사의 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윤리지침 제36조 에는 의사는 환자가 자신의 생명을 끊는데 필요한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환자의 자살을 도와주는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다. 의사조력자살은 의사들의 의료윤리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만약 의료윤리를 위배해도 좋다고 사회가 합의하게 되면,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죽음의 기술을 의대생 시절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어떻게 존엄한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는 치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현대 의학에는 수용할 수 없는 통증을 견딜 만하게 경감시키는 다양한 통증 조절법이 있다. 환자가 호스피스·완화치료 센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 안락사가 아닌 고통을 줄이는 치료를 선택하게 해야 한다. 말기암 환자의 경우, 2020년 호스피스 이용률은 23%에 불과했다. 환자의 77%는 완화 의료를 받지 못하고 통증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안락사법이 아닌 호스피스 지원법을 만들어 호스피스 병상을 기다리다 죽는 환자가 없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치료에 드는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 의료비가 없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이 없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 육체적 통증완화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심리적·영적 돌봄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족과 함께하며 심리적으로 돌봄을 받고,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영적으로 돌봄을 받을 수 있다면 안락사나 조력자살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죽음을 원하는 사람에게 그건 안 된다.’고 하고 어떻게 도와줄까?“를 물을 수 있어야 존엄한 사회다. 그것이 사회적 웰빙이다. 존엄사는 인생의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그의 삶을 돌보아주는 것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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