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명사의 결혼생활-

[의학신문·일간보사] 사람들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동양을 예로 든다면 공자는 현인과 도덕군자로서 이름을 남겨 인류역사에 우뚝 선 성인의 반열에 오른 스승이다.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은 선정과 선행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도척(盜?)과 같이 상상할 수 없는 악행을 통해서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악행으로 이름을 남긴 것이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살다보니까 그렇게 되었는지 직접 물어 본 사람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내용이라도 이름과 얼굴을 알리기 위하여 텔레비전에 나오기만 하면 좋아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황당한 헛소문으로서 전혀 아니길 바란다. 서양사에도 동양과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역사라는 거울 속에 투영된 명사들, 그리고 결혼 생활을 살펴보면 애환과 지혜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결혼이란 스스로 만든 굴레 속에서 행복과 어려움을 추구하거나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서약식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동상. 위키미디어 제공
소크라테스 동상. 위키미디어 제공

■소크라테스와 부인 크산티페

소크라테스(Socrates, BC 5세기)의 부인 크산티페(Xanthippe)는 남편의 언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항상 상스러운 말로 욕을 하는 등 남편을 경멸하여 인류 역사상 악처의 대명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악처(惡妻) 노릇은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과장되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에 악처로서의 행각의 정도는 확실하지 않다. 크산티페가 최고의 악처이었는지 아니면 소크라테스가 사상 최고의 악부(惡夫)였는지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만큼 크산티페가 악처는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좀 더 객관적이다.

남편이자 사상가였던 소크라테스의 사고 수준과 방향 그리고 삶에 대한 생각이 부인 크산티페와 많이 달랐기 때문에 발생된 부부간의 갈등이 침소봉대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편인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을 등에 업은 평가는 상대적으로 크산티페의 악명을 더욱더 악화 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BC 399) 당했을 때 두 아들(소프로니스코스와 메네크세노스)이 어렸다는 점에 비추어 재혼이든 만혼이든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컸을 것이다. 수신(修身)은 모르지만 제가(齊家)와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해 가장으로서 소크라테스의 역할이 컸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보면 삶에 대한 내외간의 생각에 차이가 많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크산티페가 악처라는 것이 과장일 수는 있지만 현모양처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의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나아가 악처덕분에 위대함이 좀 더 돋보였는지도 모른다.
장성구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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