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문화로 읽다<31>

외설과 예술, 표현의 자유Ⅱ

[의학신문·일간보사] 미국 사진가 로버트 메이플소프(1946–1989)의 『Robert Mapplethorpe; More Life』 전이 지난 2월 18일부터 3월 28일까지 국내에서 처음으로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렸다. 인물과 꽃 그리고 조각 작품을 찍은 사진으로 구성된 전시였다. 전시 부제목인 'More Life'는 퓰리처상과 토니상 수상을 통해 ‘미국 문학의 전환점’이라는 평가를 받은 극작가 토니 쿠쉬너의 연극, 『미국의 천사들』의 마지막 대사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 연극은 동성애자 커플을 중심으로 1980년대 에이즈(AIDS)가 창궐한 뉴욕의 현실을 판타지로 구현한 작품이다.

로버트 메이플소프 ‘켄 무디와 로버트 셔먼’ 1984
로버트 메이플소프 ‘켄 무디와 로버트 셔먼’ 1984

메이플소프는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성적 지향에서 비롯된 일들을 일기 쓰듯이 사진을 찍었는데,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43세에 에이즈로 숨졌다. 큐레이터이며 컬렉터면서 메이플소프의 연인이자 후원자였던 샘 와그스터프가 1987년에 에이즈로 죽을 무렵, 그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 확진 판정 후 2년여를 더 산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에 전념했다. 그가 커밍아웃하기 전 20대 가난한 시절, 지금은 ‘펑크 계관 시인’이라 불리는 싱어송라이터 패티 스미스와 연인 사이였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메이플소프는 1970년대 말 맨해튼에 있는 동성애자 클럽 마인샤프트에서 사도마조히즘 같은 그들만의 문화를 사진에 담았다. 그는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 있는 작품들로 인해 미술계에서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 작가였다. 소재에서 비롯된 갈등이었으나 감춰져 있던 세계를 드러낸 충격과 더불어 완벽한 구도와 치밀한 조명 같은 형식적인 면에서 높이 평가를 받아 죽기 7개월 전인 1988년 7월 뉴욕의 휘트니미술관에서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12월에는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대학 현대미술연구소(ICA)에서 그의 생전 마지막 개인전인 『The Perfect Moment(완벽한 순간)』이 열렸다.

NEA 기금 지원 놓고 ‘문화전쟁’ 시작

로버트 메이플소프 ‘양귀비’ 1988
로버트 메이플소프 ‘양귀비’ 1988

이 전시는 우리나라로 치면 문예진흥기금이라 할 수 있는 국가예술지원금(NEA) 3만 달러를 지원받아 진행되었다. 이후 이 전시는 미국 내 일곱 개 주요 미술관 순회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필라델피아 전시 후 시카고 전시도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사건은 다음 전시 예정지인 워싱턴 D.C.에서 발생했다. 전시를 개최하기로 한 코코란 갤러리가 개막 두 주 전인 6월 13일에 전격적으로 전시 취소를 공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수정헌법 제1조, 즉 표현의 자유에 반하는 예술의 검열이라고 주장하는 진보 좌파와 국민 세금으로 조성한 기금으로 예술을 후원하기 때문에 공공성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보수 우파 사이에 벌어진 ‘문화전쟁’의 시작이었다.

문화전쟁은 1989년 4월 5일 지금은 The America Family Foundation이라 불리는 단체의 도널드 와일드몬 목사가 사진가 ‘안드레 세라노의 『오줌 속의 예수』라는 사진 작품을 보고 종교인으로서 걱정되는 바를 담은 편지’를 모든 연방 의회 의원들에게 보내면서 촉발되었다. 『오줌 속의 예수』는 가톨릭 신자인 세라노가 자신의 오줌 속에 예수 십자가상을 담가놓고 찍은 사진이다. 와일드몬 목사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절대로 오늘처럼 우리나라에서 예수를 비하하는 무례와 모독을 보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육체적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그러한 편견에 맞서기 위해 용기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안드레 세라노 ‘오줌 속 예수’ 1987
안드레 세라노 ‘오줌 속 예수’ 1987

이 편지로 인해 세라노가 『오줌 속의 예수』를 제작하는 데 NEA 기금을 지원받은 것이 정치권에서 문제가 되었다. 세라노는 남동부 현대미술센터(SECCA)가 NEA로부터 7만 5천 달러를 지원받아 기획한 순회전 『시각 미술 7인 수상전』에 선정되었고, 그 때 제공받은 연구비 1만 5천 달러로 이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다음 달에 공화당 소속의 대표적인 보수파 상원의원 제시 헬름스와 알폰스 다마토는 NEA 기금지원 절차에 문제를 제기했다. 헬름스는 세라노를 “예술가가 아니라, 멍청이”라고 불렀고, 다마토는 의회에서 작품 복사본을 보란 듯이 찢으며 “비열하고 비열한 음란물”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상원의원 25명은 기금 수여 절차의 수정을 요청하는 내용의 서한에 서명하여 NEA 의장에게 발송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원들은 NEA 지원금을 받은 메이플소프의 전시가 곧 워싱턴 D.C.에 소재한 코코란 갤러리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참고로 메이플소프는 3월에 사망했다. 격분한 100여 명의 의원은 6월 8일 세라노와 메이플소프 같은 작가에게 NEA가 지원한 것을 규탄하는 서한에 서명하여 NEA 의장에게 전달하였다. 서한의 주된 내용은 NEA 재정을 큰 폭으로 삭감할 것이며, 취미와 품위에 대한 공공기준을 명확하게 존중하는 새로운 지침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코란 갤러리는 6월 13일 메이플소프 전시를 자진해서 취소했다. 격앙된 의원들의 경고가 있음에도 전시를 강행했을 때, NEA 기금 운용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 철회를 정치적 압력에 의한 자가 검열로 인식한 미술가들은 코코란 측의 결정을 맹비난하며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6월 30일 저녁에는 갤러리 외벽에 메이플소프 사진을 투사하여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또 대안 화랑인 ‘예술을 위한 워싱턴 프로젝트’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 사태는 전국적인 주요 뉴스가 되었다. 한편 의회에서는 제시 헬름스의 제안으로 NEA 기금 4만 달러를 삭감하고, 두 작가에게 기금을 수여한 기관에 5년간 기금 보조를 중단하며, 외부 심사위원이 참여하여 기금 수여의 모든 절차를 감독하게 한 수정안이 통과되었다. 문제는 다음 조항이 첨부되며 발생했다.

“이 기금의 어떤 부분도 1)가학‧피학성 변태 성욕, 동성애와 음란하거나 불쾌한 주제들, 어린이의 성적 착취나 섹스 중인 모습 2)특정 종교 또는 무종교인들의 신념이나 대상에 대한 불경 3)인종, 경향, 성, 연령, 장애 또는 국적을 잣대로 하여 개인, 집단 또는 특정 계급을 모독, 비방, 경시하는 자료들을 유포하고, 생산하는 데 쓰일 수 없다.”

NEA 지원시 ‘의회에 사전 통보’ 절충

이 조항은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자유로운 신앙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또한 언론, 출판의 자유와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와 불만 사항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에게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라고 규정한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수정안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그들 관점에서는 검열이었기 때문에 저항했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세금은 공익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하므로, 공익에 부합하는 사업에만 후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리로 맞섰다. 따라서 ‘검열’의 관점이 아니라 ‘후원’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프레임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의회는 절충점을 찾았다. 즉 향후 NEA가 SECCA와 ICA 두 기관에 지원금을 제공할 때는 의회에 사전 통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두 기관에 내린 5년 동안의 지원 취소 사항은 철회되었다. 나아가 1973년 대법원에서 판결한 ‘밀러 대 캘리포니아(Miller Vs. California)’를 규범으로 하여 NEA가 ‘음란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예술을 지원하는 것은 금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일단락되며 세인의 화제가 된 전시는 워싱턴 D.C. 전시 불발 이후 하트포드와 버클리 전시는 별다른 사건 없이 성황리에 마쳤다. 그런데 1990년 4월 7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전시가 열릴 무렵 다시금 격렬한 논쟁이 발생했다. 그 결과 미술관 관장이 고소되어 재판이 열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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