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국
한국제약협회 상무이사

잔인한 계절이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몸도, 마음도 일상의 궤도에서 자꾸 이탈하는 듯하다. 나라 안팎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미국 대선과정과 결과도 그렇고, 전례를 찾기 힘든 이 땅의 국정 농단과 민주주의 유린도 그렇고…. 설마, 설마했는데 막상 눈앞의 현실이 되고 보니 까닭모를 배신감이 솟구쳐 오른다. 그 대상은 나 자신일수도 있겠고, 특정 개인을 비롯한 무리이거나 아니면 극단으로 치닫는 세상 흐름일수도 있겠다.

그래도 마냥 분노하고, 원망하고, 한탄만 쏟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분노할 땐 하더라도 일상의 평정심을 찾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또 제대로 해내야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본분을 지키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진짜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우리 공동체의 생존과 미래 세대를 위해 누가 하든 그래도 ‘소’는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오는 11월 18일은 ‘제30회 약의 날’이다. 시민들에게 의약품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고자하는 뜻에서 제정된 날이다. 한국제약협회와 대한약사회, 한국의약품유통협회,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 대한약학회, 한국병원약사회, 한국바이오의약품협회 등 8개 유관단체가 올해는 ‘안전한 의약품 사용, 건강한 100세 시대’를 슬로건 삼아 공동으로 기념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 ‘약의 날’이 질병 치료와 예방 등 국민의 건강한 삶을 지키는 동시에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를 자임하는 제약·바이오산업의 소중함을 공감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솔직히 ‘제30회 약의 날’을 맞이하는 제약산업 현장의 요즘 분위기는 그리 밝지만은 않다. 제약산업계의 R&D 흐름을 선도해온 한미약품과 관련한 일련의 일들로 인해 우리 제약산업의 연구개발 역량과 경쟁력에 대해 과도한 디스카운트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글로벌 제약사들도 신약 개발에 실패하거나 중도 포기하는 일이 다반사다. 글로벌 연구개발 투자규모 1위를 자랑하는 스위스 제약기업 로슈의 연구분석에 따르면, 하나의 혁신 신약이 탄생하기까지 평균 700만 874시간의 연구, 6587건의 실험, 1조1667억원의 개발비용이 든다고 한다. 개발에 성공만 하면 약 하나로 1년에 15조원 이상 벌어들이는 글로벌 신약의 탄생은 이처럼 무모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투자와 실패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최소 5000개의 후보 물질 중 12년이 넘는 오랜 기간의 연구개발 과정을 거쳐 겨우 1개의 신약을 출시할 수 있는, 성공확률 0.02%에 도전하는 제약·바이오산업의 특성을 감안할 때 우리 제약산업 역시 필연적으로 겪어야할 성장통을 겪고 있다고 하겠다. 신약 개발은 그저 한 순간의 행운으로 수십조원을 거머쥘 수 있는 로또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지난해 한미약품이 잇단 신약개발기술 수출로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을 당시 한미약품의 성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심은 대부분 마일스톤을 포함, 8조원대라는 어마어마한 돈의 규모에 쏠렸다. 신약개발 R&D와 기술 수출의 특성, 신약개발의 바탕이 된 연구 인력의 열정과 노력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국내 제약사들의 경우 아직 규모가 작아 조 단위로 비용이 드는 신약 개발과정을 단독으로 수행하기 어려워 임상 1상을 끝내거나 2상을 마친 상태에서 글로벌 제약회사와 공동개발 계약을 맺은뒤 나머지 개발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후 공동 개발을 위한 임상 과정에서 약효가 예상보다 낮다든가 의외의 부작용이 나왔다든가 하면 중단되기도 하고 다른 제약사가 개발중인 경쟁 약물의 효능이나 개발속도가 너무 좋으면 자체약물 개발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약개발의 특성상 계약해지는 자주있는 일이며, 임상시험 중에 부작용이 발견되고 사망사고 등이 발생해 실패하기도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도 한미약품과 녹십자, 유한양행을 비롯한 많은 국내 제약기업들이 계속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글로벌 제약사들과 계약을 맺고 공동으로 개발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신약개발 그리고 1400조 세계 의약품시장에서의 국부 창출 경쟁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임상 결과나 시장 환경에 따라 중도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마다 주가가 요동치고, 시장이 혼란에 빠지고, 해당 기업은 물론 산업 전반에 대한 불신이 가중된다면 현장의 신약 개발 의지는 꺾일 수밖에 없다.

한 국가의 의약품 개발생산 역량은 사회안전망의 기본이다. 때문에 UN은 2013년 각국 제약산업이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공장 등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가 그 나라 국민의 건강권을 위한 필수요소중 하나라고 선언한바 있다.

우리 제약·바이오산업은 국민의 소중한 건강주권을 지키는 동시에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산업으로 자리잡기 위해 일련의 악재들을 반드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것이다. ‘제약보국’이라는 업의 존재이유를 숙명이라 여기고 수 없이 많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도전해나갈 제약인들의 기업가정신, 그들의 열정을 꺾어 포기로 내모는 일이 없도록 정부의 일관된 지원·육성정책과 국민들의 응원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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